2017/12/03 11:44
필립 글래스 자서전이 나오자 바로 사지 않은 건 일 때문에 읽어야 할 책이 밀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 법이고 결국 읽고 있다. 우리가 듣는 음악의 대부분은 사라진다. 그래서 ‘진행 중인 클래식’과 관련한 이야기와 진술은 흥미롭고 종종 교훈적이기까지 하다. 책에 등장하는 음악가들의 음악을 새삼스럽게 틀어보며 읽는 것도 재미다. 딱 한 사람은 예외다. 스티브 라이히. 실은 책을 열어 가장 먼저 한 일이 (점잖지 못하게도) 맨 뒤 인명색인에 그의 이름이 있는지 확인하는 거였다. 예상대로 없었고 ‘하여튼 영감들 참’ 하며 웃었고 어떤 균형을 위해 그의 음악을 추가했다.
2017/12/03 11:44 2017/12/03 11:44
2017/12/02 10:00
근래 시민들이 소셜미디어 공간에서 보이는 모습은 대체로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을 찾아다니며 집단 이루기’ 혹은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적대하기’인 듯하다. 토론이나 배움은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만 가능하다. 나와 같은 의견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위로뿐이다. 외롭고 고단한 세상이고 누구나 위로는 필요하다. 그러나 수백수천만의 성인이 위로만 받으려는, 종일 틈만 나면 징징거리며 몰려다니는 풍경은 우습고 기괴하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바치는 시간의 일부를 혼자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외로움을 이기는 궁극적인 방법은 위로가 아니라 고독이다.
2017/12/02 10:00 2017/12/02 10:00
2017/11/22 21:20
초인적 헌신성을 보이는 의사가 인권 의식은 일부 낮을 수 있다. 인권 의식은 초인적 헌신성에 자동으로 따라오는 게 아니라 엄연히 공부해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권 의식이 일부 낮은 게 확인되었다고 해서 그의 초인적 헌신성이 철회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둘은 다른 고유한 가치를 갖는다. 이국종 선생은 이번 기회를 통해 의사로서 매우 의미있는 인권 공부를 한 셈이다. 좋은 일 아닌가. 모욕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 본인이 느낄 이유가 없는 모욕감을 다른 사람이 대신 느낄 이유 역시 없다.
2017/11/22 21:20 2017/11/22 21:20
2017/11/22 11:41
아침에 친구와 통화하다 둘의 또 다른 친구와 매우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 이야기가 나왔다. “가까운가 가깝지 않은가를 떠나서 생각해야, 그가 가진 나름의 가치가 제대로 보이는 것 같아.” 말은 쉽게 했지만 살다보면 사실 이게 참 어렵다. 가까운 사람이라면 이해하고 넘어갔을 일도 가깝지 않은 사람이라면 부정적 판단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 일과 관련한 그의 상황이나 사정을 얼마나 아는가가 판단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까운 사람이라면 그 일에 대한 판단에 머물렀을 경우도 가깝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 대한 판단으로 확대되기 십상이다. 사람의 사람에 대한 판단은 가치 기준보다는 관계의 거리와 큰 관련이 있다. 가까운 사람을 더 많이 이해하는 건 인간적이다. 다만 가깝지 않은 사람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걸 기억하는 게 좋다.
2017/11/22 11:41 2017/11/22 11:41
2017/11/17 11:53
개혁할 문제인가 변혁할 문제인가, 를 분별하는 일은 사회 문제를 고민할 때 첫번째 숙제가 된다. 개혁은 현재 체제 안에서 문제를 고쳐나가는 것이고 변혁은 현재 체제를 부정하고 새 체제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최근 명성교회 문제를 비롯 오랫동안 헌신적으로 노력해온 교회개혁 운동을 존중한다. 그러나 그 교회들이 과연 개혁의 대상인가 변혁의 대상인가는 짚고 넘어갈 때가 되었다. 세습이나 비리 같은 특별히 불거진 문제에 대한 집중, 즉 비판의 이벤트화는 그것만 아니면 온전한 교회라는 오해와 착각을 양산한다.

문제의 핵심은 비리가 아니라 마몬주의다. 예수를 도구로 돈을 섬기는 일이다. 합법인가 불법인가는 부차적인 문제다. 오히려 합법적이고 점잖은 마몬주의(투명한 교회 재정과 일정한 자선사업까지 수반하는 식의)는 불법 비리나 부정을 수반한 마몬주의보다 더 체계적으로 교회와 신앙을 파괴하기도 한다.

판단하기 어렵거나 망설여진다면 예수를 따라 하면 될 것이다. 예수는 성전을 개혁하려 한 적이 없다. 아예 부정하거나 ‘돌 하나 남기지 않고 허물어질 것’이라 선언했을 뿐이다. 예수는 성전이 하느님과 인민의 관계를 차단한다고 봤다. 오늘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2017/11/17 11:53 2017/11/17 1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