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08/04 16:15
거들고 있는 웹진의 인터뷰 리스트에 한대수를 올려놓고 이 사람은 뉴욕에 사니까 팩스나 인터넷으로 인터뷰를 해야겠구나, 그런데 연락처를 어디다 알아보나 하며 혼자 흥미진진해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한대수가 자서전을 냈다. 나는 인터뷰 계획을 취소하고 대신 한대수의 자서전을 읽는 기쁨을 얻기로 했다. 한대수가 자서전을 내다니.

초등학교 5학년 때던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실존적 고민에 빠져 꼬박 1년을 가위눌려 살았던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낭만적인 힘'을 얻었다. 누구 노랜지 제목이 뭔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그 노래에 감사했다. 그 노래는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였다. 10년쯤 전. 열정의 음악사가들(모든 음악 생산물에 역사적 의미를 잣대로 별을 매기는 사람들. 신중현에게 '이제 보니 위대한 록'이라고 적힌 별을, 산울림에게는 '다시 보니 창조적 록'이라는 별을 달아준 바 있다. 이제 그들은 한대수에게 '돌아온 포크록의 생부'라고 적힌 별을 달아 준다.)이 한대수를 "이 땅의 현실에 뿌리박지 못하고 행복의 나라(미국)로 떠나 버린" 쪼다로 폄하한 글을 읽었다. '반동으로 몰린 은인'을 바라보며 나는 절망했다. 그리고 지난 해, 이소라 숀가 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드디어 한대수가 노래하고 자기 얘기를 하는 걸 볼 수 있었다.

한대수는 좀더 살이 붙고 좀더 이마가 벗겨졌지만 여전한 장발과 부츠 차림이었다. 그는 특유의 걸걸하고 강한 경상도 억양으로 자신의 옛 노래들과 <노 릴리전>, <에이즈 송> 같은 새 노래들을 불렀고 사회자의 질문에 따라 예술과 자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바람'처럼 '자유'롭게 그러나 기품 있게 말함으로써 깊은 울림을 얻고 있었다. 나는 지식인이 혹은 예술가가 입을 벌린다는 게 발언한다는 게 저런 거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 깨달음은 내가 서른 일곱 해 동안 이 나라의 사람들로부터 전혀 얻을 수 없었던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나의 초등학교 1학년 담임은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잃어버리자 아이들을 하루 종일 변소에도 못 가게 하고 교탁에 엎드려 울었다. 울다가 한번씩 우리를 노려보던 그 추한 눈빛을 난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선생들은 언제나 자기 한 몸 건사하기 힘든 인격을 폭력으로 벌충하는 그런 인간들이었다. 학교 다니는 일이 끝나고 문화계 언저리에서 건달 노릇을 하게 된 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회의 선생'이 학교 선생과 다른 건 때리지 않는다는 점뿐이었다. 장엄한 예술가 선생은 알고 보면 장엄한 정신지체아였고 존경받는 인격자 선생은 실은 공명심과 출세욕만으로 채워진 인격장애자였고 입만 열면 역사를 말하는 열혈지사 선생은 자기 아내와 자식한테서조차 존경받지 못하는 불쌍한 생쥐였다. 이 나라의 더러운 역사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기로 했지만 그들 덕분에 나는 적을 보며 비분강개하는 일보다는 우리 안의 위선을 조롱하는 일을 더 즐기는 비틀린 사람이 되었다.

한대수의 자서전은 정직했다. 그는 쪼다가 아니었다. 그가 이 나라에서만 살던 사람들보다 먼저 '자유'와 '바람'을 먹었다는 게 언제나 문제였지만 그 역시 그의 죄는 아니었다. 그는 가슴 아픈 성장기를 거친 한국 소년이었고 '빳다'를 치는 한국 군대에 다녀 온 유일한 뉴요커였다. 한대수는 남자가 생겨 자기를 떠난 전처의 '그 남자'가 곤경에 처하자 그를 집으로 데려와 먹이고, 나중엔 '그 남자'와 헤어지고 신경쇠약에 걸린 전처를 새 아내와 사는 집으로 데려와 보살피는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었다. 불의 열정으로 인생을 채워 온 그 '야수'가 말이다. 한대수의 50여 년 생애의 얼개가 한 조각씩 드러날 때마다 나는 '인간 한대수'에게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다. 최영미는 죽은 김남주에게 "선생님 차라리 잘 돌아가셨어요"라고 적었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 있는 이 멋진 사나이에게 무릎 꿇고 말한다. "형님, 절 거두어 주십시오." | 씨네21 1998년_7월
1998/08/04 16:15 1998/08/04 16:15
1998/07/14 16:14
몇 주 전 여기에다 금 모으기 운동이 우리 사회에 뿌리 박힌 파시즘의 반영이라고 써놓곤 내내 편치 않았다.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선의를 차갑게 재단하는 일은 불행했다. 게다가 "한국인들은 누구든 앞장만 서면 무턱대고 따라가는 들쥐"라는 20여 년 전 주한미군 사령관의 말까지 인용한 것은 평소 나라 걱정보다는 일신의 안위만을 위해 살아가는 '집쥐'인 나로선 당치 않은 짓이었다. 설사 내가 지껄인 그 말들이 말로선 옳다고 해도 말이다. 나는 내가 일종의 파시즘 노이로제에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시작된 월드컵은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월드컵은 이 나라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본선 진출이 확정될 무렵만 해도 이 나라 사람들은 그저 16강 진입이나 1승 가운데 하나가 이루어지길 차분하게 소망할 뿐이었다. 이때만 해도 아무도 미치지 않았다. 이 나라 사람들이 갑자기 미치기 시작한 시점은 조 배정이 되고 멕시코가 가장 승산 있는 상대로 지목된 다음부터였다. 사람들의 생각은 아무 개연성도 없이 그러나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해갔는데 '이길 가능성'은 "이길 수 있다"는 구호로 변하고 다시 "이길 수 있다"는 구호는 "이긴다"는 신념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패기와 정신력'이라는 실체 없는 전력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멕시코와의 경기가 있던 날, 평소 축구엔 아무 관심이 없을 뿐더러 그날 따라 유난스러웠던 돌배기와의 전쟁을 방금 끝낸(재운) 아내가 지친 몸에도 아랑곳없이 텔레비전 앞에 버티고 앉더니 '2:1'이라는 예상 점수를 제시했다. 이 여자까지 미친 건가. 나는 아무래도 한국팀이 이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하석주가 프리킥을 골로 만들었을 땐 나도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고 그만큼 질 가망성도 남았다. 나는 연막을 치기 시작했다. "꼭 우리 팀이 이겨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최선을 다해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게 스포츠 정신 아냐." 한 골을 먹자 나는 초조해졌다. "우리 나라처럼 축구 기반이 안 된 나라에서 16강을 바라는 건 말도 안 돼. 본선 올라간 것만 해도 업어 줄 일이지. 일본은 월드컵 경기장을 벌써 일곱 개나 지었대. 우리 나라는 설계도 못했잖아." 드디어 역전골을 먹었지만 나는 끝까지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멕시코 독재가 얼마나 무식했게. 물론 우리가 이기면 좋지만 멕시코가 이기는 것도 나쁠 건 없지. 오랫동안 고생한 멕시코 민중들한테 얼마나 위로가 되겠어. 동병상련이잖아." 한 골을 더 먹고서야 후반전 종료 호각 소리가 났다. 온 나라가 침울하고 나는 잠자코 아내의 말을 기다린다. "당신이 재수 없는 소리만 해서 진 거예요." 아내는 애써 웃고 있지만 그 웃음 뒤엔 '재수 없는 인간'에 대한 적의가 숨어 있었다. 나는 평화를 원했다. "그래 나 땜에 졌어."

내가 앞서 말한 파시즘 노이로제를 해명하려는 나름의 노력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건 한국팀이 네덜란드에 대패하고 감독이 잘리고 마지막 경기 벨기에전까지 끝났을 때, 그러니까 이 나라와 이번 월드컵과의 모든 결론이 내려지고 나서였다. 그 동안 월드컵에서 일어난 이런저런 사실들을 떠올려가며 생각을 정리해가던 나는 문득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패기와 정신력'이라는 실체가 없는 전력에 기대를 걸고 미쳐 간 이 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순박한가 하는 생각이었다. 월드컵은 분명 이 나라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지만 알고 보면 오늘날의 월드컵이란 4년에 한번씩 온 나라가 '짜고 미치는' 축제가 아니던가. 축제가 전무한 이 나라 사람들이 거기에 껴서 며칠 동안 살짝 미치는 '순박함'에 파시즘의 혐의를 둘 순 없는 일이었다. 요컨대 내가 집착하는 '우리 안의, 이면의 파시즘' 가운데 일부는 어쩌면 '우리의 순박함'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은 당연히 보수반동 세력 따위의 '고전적인, 드러난 파시즘'에 뿌리를 두고 있는 부분과는 '구분'될 수 있는 것이었다. 비로소 나는 파시즘 노이로제에서 탈출할 수 있는 구멍을 찾은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파시즘은 절대악이지만 '구분'만 분명하다면 이제 나는 얼마든지 파시즘 노이로제에 빠져도 좋은 것이다. | 씨네21 1998년_7월
1998/07/14 16:14 1998/07/14 16:14
1998/06/23 16:13
스피드. 동이 틀 무렵 계기판의 바늘이 200km을 넘기는 순간을 경험해 보았는가. 세상은 적막해지고 시야는 느리게 흐르는데 감흥에 취해 눈이라도 감으면 3초 안에 죽음이 다가온다. 스피드는 예술이다. 125cc 오토바이로부터 시작된 20여 년에 걸친 나의 스피드 체험에 의하면 스피드는 다른 어떤 무엇도 아닌 그저 예술인 것이다.

이런 몽롱한 소리를 그것도 구제금융 시대에 지껄여도 '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나는 행복하다. 알량하나마 출판사 발행인이 아니라면, 이 지면이 '고급 비평정보'를 추구하는 유명 영상지의 고정란이 아니었다면 어렵지 않았을까.(이거야말로 정말 치사하기 짝이 없는 나의 사회적 신분이 아닌가) 그런데 만일 이런 얘기를 낮엔 철가방을 나르고 밤이 오면 대학로에 나가는 열 일곱 살 짜리 폭주족이 한다면 어떨까.

한국의 폭주족은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에서 티뷰론을 타는 중산층 자식들이 아니고 가죽옷을 걸치고 자동차보다 비싼 할리 데이비슨을 타는 미국 폭주족들과도 전혀 다르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미래에 명예나 지위 출세 안정 따위가 놓일 자리가 없음을 너무 일치감치 알아차린 나머지 '미래'가 있던 그 자리에 '뿅카'를 놓아버린 순진한 소년들이다.

폭주족에 대한 사회의 적의는 지나치다.(폭주족은 오토바이를 사용한 범죄조직이 아니다. 폭주족이 경찰에 잡혀 봐야 구류 이틀밖에 살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들의 범법행위가 적어도 실정법 상으로는 매우 경미한 수준임을 방증한다.) 그 적의의 실체가 다름 아닌 계급적 경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밝고 깨끗하지 않은 모습을 한 모든 것에 대한 중산층의 불안과 혐오이자 폭주족이 자신의 비천한 신분에 대해 부끄러워하면서 죽어지내길 바라는 사회적인 요구를 거부한 데 대한 보복이다. 그 보복은 정기적으로 공공의 적을 선정하여 사회의 진짜 적을 감추는 TV라는 괴물에 의해 발표된다. "쓰레기 같은 자식들이 감히 이 사회를 지탱하는 중산층의 단잠을 깨워."

폭주족이 쇼바를 높이고 머플러에 구멍을 낸 '뿅카'로 앞바퀴를 치켜든 채 세상을 질주하는 일은 그들의 삶에서 미래를 앗아간 사회에 대한 가슴 아픈 저항이자 자신들을 위한 유일한 예술이고 퍼포먼스다. 알고 보면 누구나 폭주족만큼은 범법자다. "아저씬 음주 운전 한 번도 안 했어요? 아줌마 몰래 콩 깐 적 없어요?" 하지만 누구도 폭주족만큼 솔직하진 않다. "왜 타냐고요? 그냥요, 죽이잖아요." 그들의 잘못은 그들도 안다. "솔직히, 잘하는 건 아니죠." 하지만 그들이 죽을죄를 지은 건 아니다. "아홉 시 뉴스 보면 진짜 나쁜 새끼들은 따로 있잖아요."

사안의 성격상 나는 이쯤해서 꼬리를 접어야겠다. 폭주족을 신파적으로 미화하는 일은 지나치게 관념적이며 폭주족 문제를 '계급 대결'로 해석하는 일은 지나치게 공상적이라고 해두자. 그저 폭주족도 정당한 사회적 판정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 한가지만 분명히 해두기로 하자.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것은 삐삐밴드가 TV 카메라에 침을 뱉는 일을 저항이라고 우기는(당사자는 극구 아니라고 하는데도) 진보적 지식인들이 폭주족의 저항과 예술에 대해선 침묵하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서양 대중문화사라는 메뉴판에 나와 있지 않은 음식은 절대로 먹지 않는 그들의 격조 있는 식성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스피드를 모르기 때문일까. | 씨네21 1998년_6월
1998/06/23 16:13 1998/06/23 16:13
1998/05/26 16:12
한총련을 보면 기분이 좋다. 그들의 노선이 아니라 'GUESS' 모자와 'NIKE' 티셔츠를 입고도 '자주'를 외치는 그들의 분방함이 정말 좋다. 필자가 학교 다닐 무렵의 운동권 학생들은 밝고 화사한 빛깔이나 영문이 들어간 옷을 입는 것은 금기였다. 집회에 모인 학생들은 모두 '심각한' 빛깔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유니폼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같은 담배를 피웠고 같은 음악을 들었으며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은 소설을 읽고 같은 공연을 봤고 같은 어휘로 말했다.

파시즘은 어디에 있는가. 파시즘은 이른바 5,6공 인사나 한국논단 같은 극우집단에만 남아 있는가. 천만에, 파시즘은 우리 안에도 남아 있다. 파시스트 치하에서 몇십 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파시스트와 닮아 갔고 파시즘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다. 구제금융을 부른 '국가'가 그 원인을 '국민의 과소비'라 둘러대면 '국민'은 가슴을 치며 금가락지를 빼들고 방송국에 간다. '국민'의 대다수인 근로대중들이, 30여 년을 경제개발 현장에서 뼈빠지게 고생만 하던 사람들이 요 몇 년 아이들과 놀이동산 몇 번 가고 갈비도 사먹고 한 것이 구제금융의 원인인가. 우리 안의 파시즘은 우리를 한없이 비굴하게 만든다.

한 대중음악 평론가가 말한다. "우리 나라에서 뜨는 노래 절반이 일본 곡 표절인데 지금 전면 개방하면 그게 다 밝혀질 거고 그러면 국민들은 배신감 때문에 우리 가요에 등을 돌릴 거다. 개방을 미뤄야 한다." 이런 게 바로 우리 안에 남은 파시즘이다. 여당 쪽에서 일하는 선배가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물었다. "미국영화 막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 자생력을 길러야 한다고 하지만 개방해서 경쟁하게 하는 게 근본적으로 자생력 기르는 거 아니냐?" 그 선배는 나를 일종의 영화인으로 보고 물었지만 그다지 영화인이 아닌 나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고 얼마 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그 문제를 물었다. 놀랍게도(아무래도 나만 놀란 것 같다) 하나같이 개방이 바람직하지만 그걸 '주장'할 순 없다고 답했다. 이런 게 바로 우리 안에 남은 파시즘이다. 이젠 물어야 한다. 이른바 '민족'의 이름 하에 덮어 둔 한국 대중문화 '업자'들의 '무능'과 '배신'에 대해 물어야 한다. 그들의 정조가 과연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정조인지 따져봐야 한다.

세상의 모든 파시즘은 언제나 '민족'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강북에 가본 강남의 중딩이 통신에다 소감을 썼다. "강북 형들 넘 무섭게 생겼당. 다신 안 간당..." 이 중딩과 점심을 거르는 강북의 고딩이 과연 같은 민족인가? 오늘 아침 농성장에 출근하는 노동자와 반성하지 않는 자본가가 굳이 같은 민족이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이라는 테두리 안에 사는 사람은 무조건 같은 민족이라는, '한국'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생겨나는 것은 모두 민족적인 것이고 보호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파시즘을 부른다. 전두환이 광주를 토벌하며 더러운 집권욕을 드러낼 무렵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이 지껄였다. "한국인들은 들쥐와 같다. 들쥐의 습성은 한 마리가 맨 앞에서 뛰면 덮어놓고 뒤따라가는 것이다." 위컴은 '망언'을 사과했지만 '들쥐들'은 18년 동안 덮어놓고 맨 앞에서 뛰는 놈만 따라다녀 왔다. 파시즘은 우리 안에 남아 있다. | 씨네21 1998년_5월
1998/05/26 16:12 1998/05/26 16:12
1998/05/12 16:08
대학로에 춤 공연을 보러 나갔다. 초대권으로였지만 영화고 연극이고 이른바 예술 감상을 못한 지가 1년이 넘는 나로서는 오랜만의 즐거운 외출이었다. 올해로 다섯 번째인 '민족춤 제전'은 출품작들의 수준이 비약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주제 의식에 대한 강박이 없어졌다는 점이 춤 언어를 세련되게 만들었고 보는 사람을 안심하게 했다. 행사를 꾸린 김채현 선생에게 "민족춤 같지 않네요."라는 농을 던지며 유쾌하게 웃을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자못 문화적 포만감에 젖어 극장 밖으로 빠져 나오는 순간 가까운 곳에서 굉장한 음량의 음악과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예정에도 없던 공짜 라이브를 건지는구나 하는 생각에 다가가 보니 수백 명의 교복들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머리를 가지각색으로 물들이고 헐렁한 옷을 입은 10대들이 댄스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또 하나의 춤공연이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대로 된 조명도 없이 민족춤 제전이 열리는 문예회관 대극장의 외등에 의지하는 소박한 공연이었지만 그 열기는 대단했다. 대략 열 명쯤인 댄서들이 군무를 하다가 한 명씩 앞으로 나와 묘기에 가까운 애드립을 할라치면 수백 명의 교복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댄서들 가운데는 그쪽에서 꽤 알려진 친구들도 있는지 "삼식이 오빠 짱이야!" 하는 실명이 들어간 고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의 공연은 용감하고 당당해 보였으며 그들의 댄스는 건강하고 아름다웠다. 그들을 가르치는 어른들이 같은 곳에서 판을 벌인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 썰렁함과 퇴폐에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은 자꾸만 헤벌쭉 벌어지는 입을 내내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러다 나는 문득 긴장했다. "댄스음악을 다시 봐야겠다. 저 친구들한텐 그게 록이었구나."

대중문화를 말하는 사람들은 댄스음악이 판치는 현실, 10대들이 댄스음악에 경도 되어 있는 현실에 대해 우려한다. 거기에는 장르의 편향성에 대한 우려 말고도 댄스음악이라는 장르의 뒤편에 숨겨진 음험한 상업성에 대한 비판도 들어 있을 것이다. 나만해도 웬만하면 한 주에 한번쯤은 가요 프로그램을 보고 싶지만 양파 까듯이 반복되는 댄스음악을 견뎌내지 못하고 번번이 포기하고 마는 처지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댄스음악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해야겠다. 1. 댄스음악은 누구의 것인가? 10대들이다. 2. 그들이 댄스 음악을 선택한 이유는? 춤추기 위해서이다. 3. 그들은 왜 춤을 추는가? 그냥, 좋아서. 4. 굳이 복잡하게, <시네21> 독자들 수준으로 얘기하면? 그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로부터 '탈출'하고 그들을 억압하는 기성세대와 주류사회에 '저항'하기 위해서...

댄스음악은 록이 아니다. 그러나 록을 진정한 록일 수 있게 하는 이유가 이른바 록정신에 있다면, 다름 아닌 탈출과 저항의 정신에 있다면 98년 한국의 틴에이저들은 댄스음악으로 록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들이 원전(미국 대중음악사)을 따르지 않고 그들만의 록으로 댄스음악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한국의 10대들의 정서가 많이 서구화되었다곤 하지만 여전히 록까지는 아니어서일 수도 있고 그들의 사회적 처지가 60년대 미국 노동계급의 10대들과 달라서 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대중음악사가 이 나라에서 똑같이 반복되어야 할 어떤 이유라도 있는가.

댄스 하는 그들, 대한민국의 10대들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나. 이른바 기성세대와 주류사회는 그들을 위해 어떤 세상을 준비해 놓았나. 모든 갓난아이들이 20년 동안 오로지 대학입시라는 이름의 '계급 결정시험'만을 위해 살도록 정해진 대인국에서 바로 그 '계급 결정시험'을 목전에 둔 10대라는 소인들이 춤을 춘다. 그들의 적은 그들을 뺀 전부이며 그들은 댄스로 록을 한다. 끝없이 탈출하고 무작정 저항한다. 그들은 예술의 사회성을 모르며 역사적 전망을 모르며 어떤 종류의 전략도 가지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록정신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록정신으로 충만하다. 그들의 댄스를 막지 마라. | 씨네21 1998년_5월
1998/05/12 16:08 1998/05/12 1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