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7/10 17:12
다섯 살 무렵 아버지는 식솔들을 이끌고 전라북도 옹동 산골로 들어갔다. 박정희 정권이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빈민들에 야산을 불하하여 개간하게 하는 '후생촌'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종일 바위를 파내고 땅을 골라 농사 지을 땅을 만들었고, 나는 종일 그들 곁에 쪼그리고 앉아 막대기로 땅바닥에 그림이나 그리며 까맣게 그을렸다. 두 해째 봄이 올 무렵 아버지는 지난가을 수확한 고구마를 묻어 놓은 구덩이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걸 발견했다. 고구마는 모두 썩어 있었다. 낙심한 아버지는 그간의 고생을 뒤로한 채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전주로 떠났다.

후생촌을 기억하는 추억 가운데 하나는 '돌팔이'다. 서른 남짓의 그는 서울 어느 병원에서 어깨 너머로 의료일을 배웠다고 했다. 아픈 사람이 생기면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연락했고 그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자전거에 왕진가방을 싣고 달려오곤 했다. 내가 마루에서 발을 헛딛고 떨어져 눈두덩이 벌어졌을 때나, 무리한 노동을 견디다 못한 어머니가 입과 코로 피를 쏟고 쓰러졌을 때도 말이다.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이 오죽했으랴만 희한하게도 마을 사람들이 돌팔이의 의료 실력을 못미더워 하는 일은 없었다. 더욱 희한한 일은 노인들조차 그를 하대하지 않을 만큼 마을 사람들이 그를 존대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이를 갖게 되고 그 아이 덕에 의사를 만나는 일이 잦아지면서 나는 어릴 적 후생촌 사람들이 돌팔이에 보이던 그 희한한 존경, 돌팔이에 의사 선생님 대접을 하던 이유가 친절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친절이야말로 의사가 의사일 첫 번째 조건이다. 의사를 찾는 환자는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을 망정 절대적인 불안 상태에 있게 마련이다. 자신이 왜 아픈지 그 아픔과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결부될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환자 앞에 선 의사는 절대적인 권위 상태에 있다. 설사 그가 돌팔이보다 못한 실력을 가진 의사라 해도 환자는 그 권위를 거부할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의사의 친절은 절대 불안 상태의 환자와 절대 권위 상태의 의사가 인간적으로 소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돌팔이 이후 내가 만난 의사들이란 늘 불친절했다. 몸에 좋고 나쁜 걸 잘 구별해 먹어선지(이른바 의사답게) 평균보다 뽀얀 외관을 한 그들은 늘 환자에게 불친절했다. 그들이 그 뽀얀 입을 여는 순간이란 자기들(이른바 의료진들)끼리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할 때뿐이다. 그런 때 그들의 얼굴은 생선 가게 앞에서 생선의 물을 의논하는 아주머니들의 나른한 얼굴과 같다. 답답하다 못한 환자나 보호자가 비굴함을 넘어서는 겸손으로 질문이라도 할라치면 그들은 그 질문의 비전문성을 사사오입한다. 환자와 보호자는 그런 모욕을 당하면서도 행여 그들에게 밉보일 새라 끓는 속만 다스린다.

오늘 우리가 의사들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이유가 그들이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특별한 임무를 가진 사람들이라서라는 의견은 순진하다 못해 아둔하다. 오늘 우리가 의사들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이유는 단지 절대 불안 상태의 환자들 앞에서조차 불친절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유지하는 그들의 절대 권위 때문이다. 몇몇을 빼고라면 오늘 우리 앞에 선 의사들 가운데 히포크라테스나 허준의 정신과 연관된 어떤 특별한 직업관을 가진 의사는 존재하지 않는다.(최근에 발견된 그들의 특별한 직업관은 자신들의 주장을 위해선 사람이 죽어나가도 좋다는 숭고한 신념이다.) 알다시피 그들이 의사가 된 이유는 단지 사회의 상층부에 살기 싶은 욕망에서였고 그들의 모든 관심은 그 욕망의 실현 여부에 있다.

의사라는 직업을 생각하면 나는 어린 시절 돌팔이를 떠올린다. 그는 환자에게 친절했고 의사 자격증은 없었지만 환자가 믿고 몸을 내맡길 만큼의 실력을 가졌으며 가난한 환자에게선 적은 돈만을 받았기에 마을 사람 평균의 살림보다 결코 낫게 살지 않았다. 돌팔이는 의사였고, 나는 돌팔이 이후 돌팔이보다 나은 의사를 만나지 못했다. | 씨네21 2000년_7월
2000/07/10 17:12 2000/07/10 17:12
2000/06/27 17:09
브레히트 식으로 감정이입을 차단하거나 혐오를 통해 예술적 성취를 노리는 경우를 빼고라면, 예술작품의 필수 덕목 가운데 하나는 자연스러움이다. 그것은 진솔한 사람이 주는 인간적 호감과 비슷한 것으로 대중음악처럼 사람들의 일상에 맞닿은 예술일 경우 더욱 그렇다. (내가 대중음악에 자연스러움이라는 덕목을 특별히 중시하는 데는 약간의 정황이 있다. 그것은 90년대 이후 80년대 좌파 문화운동에 종사하던 일군의 지식인들이 대중문화 영역으로 대거 '투신'한 일과 관련한 것이다. 80년대에 정치로 예술을 지도하던 그들은 90년대에 지식으로 예술을 지도했다. 90년대 한국에서 록이 자못 인탤릭한 음악이 된 해괴한 상황이나 날라리의 입에 지식인의 언어를 담은 부자연스런 대중음악 작품들이 양산된 일은 전적으로 그들의 공이다.)

우리 대중음악가들 가운데 자연스러움을 기준으로 나는 단연 DJ DOC를 꼽는다. '전향한 날라리'인 나는 한눈에 그들이 "제법 놀 줄 아는 날라리들"임을 알 수 있었다. "뒤통수가 이뻐야만 빡빡 미나요 나는 뒤통수가 안 예뻐도 빡빡 밀어요 ... 옆집 아저씨 반짝 대머리 옆머리로 소갈머리 감추려고 애써요 억지로 빗어 넘긴 머리 약한 모습이에요 감추지 마요 빡빡 밀어요" 날라리가 날라리의 언어로 세상에 의견을 제출하는 광경은 내게 충격이었다. 그 즈음 주변의 만류로 빡빡 밀기를 미루던 나는 그들의 지도에 감화되어 빡빡 밀기를 감행했다.

대중음악이란 예술 장르가 본디 날라리의 영토이듯 (사회 시스템이 제시하는 행동수칙과 일상적 긴장을 이루는) 불량함은 날라리들의 고유한 신분 증명이다. DJ DOC 5집은 날라리의 불량기가 갖는 사회적 능력을 잘 보여준다. 는 4집 이후 3년 가까운 공백기간 동안 자신들을 능멸한 상업 언론에 대한 정연한 반박문이다. "벌써 2년 지나 공백기간 동안 우릴 마치 쌩양아치로 매도시킨 너희 사이비 기자들 잘 들어봐 ... 그래 써라 씨발아 날려대라 그 똑똑한 그 잘난 머리 팬 잘 굴려라 ... 너희에게 팬, 종이가 있다면 내겐 내 한 맺힌 VOICE와 M.I.C가 있다 씨발아 집어쳐라 닥쳐라 좆까라 가라 저리 꺼져라"

민요 <새타령>을 모티브로 한 판소리 사설풍의 <포졸이>는 최근 2,3년 동안 폭력, 약물 등과 관련하여 경찰서를 제집 드나들 듯한 이 날라리들의 빼어난 골계다. "새가 날아든다 왠갖 짭새가 날아든다 새 중에는 씨방새 날지 못하는 새 짭새 새가 날아든다 짭새가 날아든다 문제야 문제 우리 나라 경제 좆같은 짭새와 꼰대가 문제 ... 이번엔 짭새 얘기해볼 게 짭새가 우리 민중의 지팡이 하 하 좆까라가라 나 나라나라 우리 나라 정말 좋은 나라"

전반적으로 DJ DOC 5집이 갖는 특별한 가치는 사적 체험을 깊은 자의식으로 담아 낸다는 점이다. 자의식이야말로 상업적인 의도로 사회적 소재를 채용하는 노회한 공산품들과 대중음악가 DJ DOC를 구분 짓는 지점이며, (한국지식인들의 글엔 자의식이 없다는 서글픈 상황을 생각한다면) DJ DOC는 이 앨범으로 한국 지식인들의 평균 지성을 넘어선다. "옛날에는 잘나갔지 D.O.C 제법 놀 줄 아는 날나리 하늘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 잘나가던 그때가 좋았지 마이 폰 넘버 0-1-1-3-0-9-9-9-8-1 끊겼어 돈을 못 냈어 창피해서 눈물이 났어 지금 난 찬밥 쌀밥 정부미밥 따질 때가 아니지 2년이란 공백기간이 준 데미지 대박 추락하는 내 이미지"

지식인들이 "가방끈 짧은" 날라리들의 이 특별한 예술적 성취에 대해 (90년대 록에 그랬듯) 저항이니 진보니 하는 해석을 들고 또 다시 끼여드는 건 당치 않다. 진정한 저항과 진보가 '주장'되는 게 아니라 현실 시스템과의 정치적 긴장을 통해 '증명'되는 거라면, 오늘 DJ DOC는 지식인들의 관념으로 정제된 저항이나 진보에 비할 수 없이 고고한 지점에 서 있다. 그들이 한국지식인들보다 열등한 거라곤, 자신의 사회적 기여를 실제보다 부풀리는 능력뿐이다. | 씨네21 2000년_6월
2000/06/27 17:09 2000/06/27 17:09
2000/05/29 17:05
어느 대학 대동제 첫머리에 열린 "내 나이 스물"이라는 제목의 5.18 기념 강연회에 갔다. 광주항쟁에 대해 달리 새로운 걸 학습하려는 건 아니었다. (내 세대가 대개 그러하듯 나는 대학 시절 무던히도 광주의 실상을 알기 위해 노력했고 덕분에 5월 18일에서 5월 27일 새벽까지 광주의 상황을 속속들이 꿸 수 있다.) 나는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문제, 그러나 20년이 지나 정서적으로 앙상해진 문제에 살을 입힐 필요를 느꼈던 것 같고 만사를 제쳐두고 그곳에 갔다. 그런 행동이 내 알량한 사회의식을 면피하려는 연례행사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2만 명이 다니는 대학에서 열린 5.18 기념 강연회엔 채 열 명이 못 되는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연사는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으로 싸우다 5월 27일 새벽 전남 도청에서 계엄군에 생포된, 당시 스물이었고 올해 마흔인 정종선씨였다. 그는 아들이 거리로 나갈까 노심초사하는 어머니의 눈길을 피해 밤중에 몰래 담을 넘었다 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나 그와 같은 선택을 하진 않을 거라는 점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에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말했다. "내겐 카빈 소총과 수류탄이 있었다. 계엄군이 손들고 나오라 소리치는 순간 나는 죽어야 한다고, 그것만이 나를 지키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곁에서 울며 떨고 있는 여고생이 눈에 밟혀 결국 죽지 못했지만, 나는 그후 그 순간의 기억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나는 지난 20여 년을 전쟁처럼 살아 왔다."

지난 해 5.18은 어린이날과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의 열기에 묻히는가 했는데, 올해는 20주년이라선지 여기저기 5.18 기념 열기가 두드러진다. 전국 각지에서 어린 학생들이 단체로 망월동을 찾는다는 신문 기사는 그날 아침을 청량하게 했다. 그런가 하면 엊그제 지나친 영등포 어느 대로변엔 "5.18 광주 순례단 모집, 한나라당 OO 지구당"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이런 걸 '개나 걸이나'라고 했던가. 다큐멘터리 영화 <민들레>에는 유가협 어머니들이 한나라당 당사 화장실에서 "이놈들 화장실 좋은 것 좀 봐. 이놈들이 우리 자식 죽인 놈들인데..."하고 독백하는 장면이 있다. 내 생각에 그 당을 그 독백만큼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그 당에 아무리 젊은 피와 붉은 피(다른 말로, 빌어먹을 자식들과 벼락 맞을 자식들)가 수혈된다 해도 말이다.

백번을 양보하여 그 당이 이승만의 자유당과 박정희의 공화당을 계승한 곳이라는 사실은 참아 넘긴다 하자. 그러나 그 당이 도살자 전두환의 민정당을 고스란히 계승한 곳이라는 사실까지 참아 넘길 수 있는가. 사회적 사건에 대한 관용은 사회적 차원에서만 가능하다는 상식을 들추지 않더라도, 그런 권리는 20년 전 광주의 당사자에게나 있다. 그런 권리가 우리에게 없을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도살자의 숨겨진 공범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광주가 다른 지역의 한국인들로부터 얼마나 철저하게 고립되고 버려졌던가. 당시는 당시의 엄혹한 상황을 핑계로 삼는다 해도 우리가 그후 일관되게 도살자의 충실한 공범 노릇을 해온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변명할 수 있는가. 도살자가 제 손에 묻은 피를 씻고 새로운 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칠 때 압도적인 찬성을 보내고 도살자를 대통령으로 뽑고 도살자의 '정의사회 구현'을 지지하고, 그도 부족해 도살자의 충실한 동료를 다시 대통령으로 뽑아준 우리의 죄를 말이다.

폭도라 하면 폭도인가 했고 이제 항쟁이라 하니 항쟁인가 할뿐인 우리가 굳이 광주를 추억하고 광주 20주년을 기념할 이유는 무엇인가. 광주 20주년을 기념하는 우리는 그 20년 동안 광주에 지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어떤 절차를 거쳤던가. 2만 명의 학생이 다니는 대학에서 열린 5.18 강연회에 모인 열 명이 못 되는 학생과 도살자의 당이 영등포 대로변에 내 건 5.18 광주순례단 모집 플래카드의 머나먼 거리 속에서 대체 우리는 우리의 어떤 인간적 분별력을 추출할 수 있는가. 20년이 아니라 200년이 지난다 해도, 참회가 없는 우리는 여전히 도살자의 충실한 공범일 뿐이다. | 씨네21 2000년_5월
2000/05/29 17:05 2000/05/29 17:05
2000/05/17 17:03
386이라는 경박한 조어(실재한 한 세대를 그런 빈곤한 상상력으로 요약했다는 점에서, 그런 빈곤한 상상력의 조어가 멀쩡한 시사어가 되었다는 점에서, 세기말엔 세상의 미감이 동반 폭락하는 것일까)로 지칭되는, 80년대의 청년들은 80년 광주에 근거했다. 그들이 세상은 고쳐나가기보다는 갈아엎어야 한다는 합의에 이른 건 80년 광주에서 미국의 역할을 알아차리고부터다. 문부식(오늘 홍대 근처에서 <당대비평>을 만들고 있는)과 그의 동료들이 부산 미문화원에 불을 지른 일은 그 합의의 시작이었다.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내세운 군사 파시즘과 20여 년을 싸워오면서도 미국을 거스르지 않던 한국 청년들의 낭만은 급격하게 혁명의 긴장으로 전이했다.

82학번인 나는 그들의 한 성원이다. 해방 공간이 (박정희 같은 인간마저 잠시 사회주의자였을 만치) 한 군데라도 똘똘한 청년은 모조리 빨갱이로 만든 시대였듯, 80년대는 한 군데라도 진지한 청년은 모조리 빨갱이로 만든 시대였다. 미 제국주의를 만악의 근원으로 보는 종속이론에서 출발한 우리는 마오나 그람시를 거쳐 연어가 강물을 오르듯 사회주의 운동사를 거슬러 올랐다. 80년대 중반이 지날 무렵, 우리 가운데 한 무리는 레닌에 안착했고 다른 한 무리는 김일성에 안착했다. 한 무리는 한국의 80년대를 19세기말의 러시아와 등치 하여 계급 해방을 이루려 했고 다른 한 무리는 남한의 북한화를 통해 조국 해방을 이루려 했다. 돌이켜보면 그런 우리의 선택은 명백하게 좌편향이었다. 우리의 선택이 가진 이념적 현실적 합리성을 떠나 그 시기가 지난 후 우리가 보인 삶의 궤적을 반추한다면, 우리가 앞으로 보일 삶의 궤적을 추정한다면 말이다. 우리는 90년대 우편향의 바람에 편승해 (우리가 80년대에 내보인 치열함에 비하면) 서글플 만치 졸렬하게 우리의 정신을 청산했다.

80년대를 거대한 가상현실게임으로 만든 그 졸렬한 청산은 대개의 우리 안에서 오늘까지 이어지지만, 그래도 우리의 80년대를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시려온다. 80년대는 연단에 서서 20년 후 수많은 동료들의 정신을 박제로 만들어 금배지와 바꿀 계획을 짜던 놈들이나, 조직생활에 적응 못 하는 자신을 자책하며 데모만은 개근하려 애를 쓰던 나처럼 하찮은 인간들만 있었던 게 아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청년들이 두 번 다시 사적 안락을 찾기 힘들 삶의 지점을 찾아, 죽고 다치고 스러져갔다. 가슴이 시려온다. 이젠 돌아올 수 없는 그 순수와 정열의 순간을 생각하면 말이다.

이제 마흔에 임박한, 80년대의 한 하찮은 성원인 나는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좌파로 살거나 우파로 살 자유가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런 선택을 일생에 걸쳐 일상 속에서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정하는 일인 것 같다. 좌파로 사는 일은 우파로 사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어려우며,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80년대 우리의 선택은 대개의 우리가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던 것 같다.

오늘 나는 네 이념이 뭐냐는 질문에 “초보 좌파”라 답하곤 한다. 초보라 한정하는 건 내가 좌파가 뭔가를 제대로 안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이유보다는, 아직은 내가 제대로 된 좌파로 살아갈 가망성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좌파로 살아갈 수 있을까. 과연 나는 (글이나 말로가 아니라) 일생에 걸쳐, 일상 속에서 좌파의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인가. 자신 없어 하는 내게, 한 어린 후배가 붙여준 새로운 별명이 위안을 준다. B급 좌파. 그래, B급이라도 좌파로 살 수 있다면. | 씨네21 2000년_5월
2000/05/17 17:03 2000/05/17 17:03
2000/05/02 17:02
1968년, 재일교포 2세 서준식은 '조선놈이 되기 위해' 한국에 유학한다. 그러나 60년대 한국 민중들의 비참한 현실 앞에서 그는 '세상을 묶어두는' 법학을 버리고 '세상을 교정하는' 사회과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맑스레닌주의 고전들을 섭렵하던 그를 구체적인 현실 속으로 몰아넣은 건 그의 형 서승과 순진한 호기심으로 북한을 다녀온 후였다. 박정희 정권은 형제의 방북을 일치감치 파악했지만 뜸을 들였다 대통령 선거에 맞춰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발표한다. 서준식은 7년의 형기를 마치고도 전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0년의 보호감호 처분을 받는다. 도합 17년 동안의 옥살이 동안 서준식은 인간 해방의 문제가 그가 스무 살 무렵 받아들인 맑스주의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마가복음을 통해 예수를 발견하지만 끝내 전향하지 않았다. 사람의 생각은 자유롭고 그 어떤 권력도 그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는 신념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87년 비전향 좌익수(간첩)로서는 처음으로 만기 출소한 그는 도시빈민들 속에서 소박하게 살려 했지만 그를 찾아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피하지 못한다. 운동권에서조차 반기지 않던 조작 간첩의 가족들이었다. 얼마 후 그는 운명적인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을 만나고, 글을 쓰고 싶다는 또 하나의 소망을 접은 채 인권운동사랑방을 꾸리고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오늘 그는 여전히 국가권력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잡아들일 수 있는 보호관찰 상태 속에 살아가고 있다.

내가 서준식을 처음 본 건 지난 해 여름 '하루감옥체험'에서였다. 연단에 앉은 이들 가운데 유독 그만 굳은 표정으로 정좌하고 있었고 나는 듣던 대로 저 양반 되게 고집 세게 생겼군, 했다. 몇 달이 지나 인터뷰를 위해 그를 만나고 얼마간 친해지고서야 나는 그가 강고한 맑스주의자라기보다 천진한 소년에 가까움을 알 수 있었다. 온갖 색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그의 일정표와 진보적 인권운동의 틀을 잡으려 일분일초를 쪼개는 그의 초조함은 아버지의 직업을 인권운동가라 말하는 초등학생 두 딸과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 그의 아기자기함과 소박한 긴장을 이룬다. 고집불통이라는 평가는 그의 비타협성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아마도 그를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들에겐 그렇게 말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한없이 가치 기준이 낮아진 세상은 정당한 가치 기준을 지키려는 한 인간을 비난할 필요가 있는 것이리라.

내가 서준식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가 내가 만난 어떤 인간보다 존중할 만한 사회의식과 그에 합치하는 실천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지만, 졸렬하나마 글로 세상에 발언하는 내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공정성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90년대 중반 이후 시민운동이 갖는 나름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그런 운동의 각광 속에서 오늘의 구조를 넘어서려는 서준식의 운동이 갖는 가치가 폄하되는 현실을 반대한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시민운동에 대해 그 가치에 값하는 충분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면 나는 서준식의 운동에 대해 그 가치에 값하는 충분한 지지를 보내고 싶다.

인권운동가 서준식은 하늘이 준 보편적 인권을 믿지 않는다.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한 계급에 주어진 권리는 다른 계급에 억압이 되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인권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정당한 권리이며 그의 인권운동은 더 이상 억압과 착취가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당연한 노력이다. 내 생각에 서준식이 바라는 세상이 그의 당대에 도래할 가능성은 많지 않지만, 그런 세상이 언제 도래할지 얼마나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는 그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서준식은 단지 지금까지 그가 그렇게 살아왔듯 올바른 세상을 위해 올곧게 전진할 뿐이다. 올바른 것만이 영원하며 그에게 다른 선택은 없어 보인다. 나는 서준식을 지지한다. | 씨네21 2000년_5월
2000/05/02 17:02 2000/05/02 1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