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5/15 23:53
좌파 남성과 페미니스트 여성 사이의 긴장은 종종 숙명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좌파 남성들은 페미니스트 여성들을 '부르주아'라 밥맛 없어 하고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좌파 남성들을 '가부장 좌파'라 밥맛 없어 한다. 좌파남성 가운데 (여성해방 없는 인간해방을 좇는) '가부장 좌파'가 실재하고 페미니스트 여성 가운데(인간해방 없는 여성해방을 좇는) '부르주아'가 실재한다. 그러나 모든 좌파남성이 '가부장 좌파'거나 모든 페미니스트 여성이 '부르주아'는 아니다.

<그 페미니즘>을 쓰면서 "독자의 2할은 잃겠군" 했다. 좌파 남성과 페미니스트 여성 사이의 긴장이 숙명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상태에서, '좌파 남성 최초의 페미니즘 비판'은 자칫 '페미니즘 일반에 대한 가부장 좌파의 테러'로 오독 되기 십상일것이기 때문이다. 쌓이는 이메일들과 이런저런 풍문들은 그런 내 예상을 크게 비껴가지 않았다. 오독은 대개 '90년대 이후 한국 주류 페미니즘'이라는 말에서 비롯했다. 딱하게도, '주류'라는 말을 '진정한'이나 '중요한' 쯤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았다. 나는 그 말을 말 그대로 '큰 영향력'의 뜻으로 썼고 거기에 '90년대 이후 한국'이라는 시공간적 한정을 붙였다.

오독에 대해 말하는 나는 여전히 '90년대 이후 한국 주류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대체할 말을 알지 못한다. '그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특정한 유파라기보다는 90년대 이후 한국 페미니즘에 나타난 모종의 강력하고 전반적인 경향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 페미니즘'은 90년대 이후 일군의 중산층 인텔리 여성들에 의해 수입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여성해방을 인간해방과 별개로 진행한다'는 맹랑한 강령에, (한국식 한풀이에서 마초 흉내에 이르는) 이런저런 통속적 정서들을 결합한 그런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언급했던 <이프>나 최보은씨의 에피소드는 흔히 말하는 '자유주의적 도발'이 아닌 '급진주의의 극단적 통속화'라 할 만하다.

씁쓸한 건, 오독이 텍스트에서 뿐 아니라 한국페미니즘의 두리뭉실한 상태에서도 일어난다는 사실 때문이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의 일부(지만 주류라 비쳐지는) 천박한 경향에 분명한 경멸을 표함으로써 페미니즘의 건전한 부분과 떼내어 보이려는 내 시도를 '남 얘기를 내 얘기로' 알아먹었다. 되새기는 바, 한국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건 90년대 이후지만 한국 여성운동/페미니즘의 역사는 이미 한 세기에 가까운 면면한 것이다. 그들은 출발부터 여성해방과 인간해방을 함께 고민하는 건전한 전통을 가져왔으며, 여성평우회, 여성단체연합, 여성노동자회, 여성민우회 등을 조직한 80년대에는 '여성의 문제'를 양보하다시피 하면서까지 사회진보에 몰두했다.

90년대 들어 그들은 '변화한 사회 상황에 발맞추어 좀더 여성의문제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여성운동의 그런 노선변화를 '우경화'라 비판할 수 있는가는 좀더 진지하게 고민해볼 문제지만(다른 건 접고라도 80년대에 그들이 보인 양보는 매우 특별한 것이기에), 그런 노선변화가 결국 여성해방과 인간해방을 함께 고민하는 한국 여성운동의 건전한 전통과 90년대 이후 등장한 맹랑한 페미니즘이 갖는 차이를 두리뭉실하게 만들어온 건 사실이다. 바야흐로 한국 여성운동/페미니즘의 면면한 역사는 '내가 누구인지 나도 모르는' 몽환적 상태에 접어들고 있다.

좌파 남성과 페미니스트 여성 사이의 '숙명적인 긴장' 역시 오늘 한국 페미니즘의 그런 상태에서 비롯된다. 여성에 대한 억압이 존재하고 인간에 대한 억압이 분명히 존재하는 세상에서 그런 긴장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나만의 해방'을 믿는 모든 운동은 어떤 절실한 사정을 담더라도 그저 피억압자의 추악한 복수극에 불과하다. 좌파 남성들이 그들 가운데 실재하는 '가부장 좌파들'을 솎아내고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그들 가운데 실재하는 '부르주아들'을 솎아낼 때, 비로소 '숙명적인 긴장'은 '숙명적인 우애'로 바뀔 것이다. 그놈들과 그년들을 솎아내지 않고는, 좌파에게도 페미니스트에게도 미래는 없다.(씨네21 2002/05/15)
2002/05/15 23:53 2002/05/15 23:53
2002/04/23 23:50
페미니스트들에겐 유감스런 얘기겠지만, 내 주변의 진보주의자 남성들은 하나같이 주류 페미니즘(정확하게, 90년대 이후 한국의 주류 페미니즘)을 마땅치 않아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정치적으로 진보적일 뿐 여성이 처한 성적 억압엔 무감각한 형편없는 남근주의자들인 건 아니다. 그들은 적어도 '여성100인위원회'의 활동을 원칙적으로 지지하고 <밥꽃양>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을 분명한 사회적 억압의 하나로 파악하는 남성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른바 여성에 대한 성적억압과 싸운다는 페미니즘을 하나같이 마땅치 않아 한다.

나 역시 그들 가운데 하나다. '노력하는 마초'인 나는 주류 페미니즘을 몹시 마땅치 않아 한다. 내가 그 페미니즘을 마땅치 않아 하는 이유는 그들의 '사회의식'이 분명한 사회적 억압의 하나에서 출발하면서도, 모든 건강한 사회의식이 갖는 인간해방운동의 보편성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사회의식이란, 단지 제 사회적 억압을 사회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만일 그런 게 사회의식이라면 '서초구민들'이나 '의사들'의 빌어먹을 호소도 사회의식일 테니), 제 사회적 억압을 통해 다른이의 사회적 억압을 깨닫고, 제 억압을 모든 사회적 억압의 지평에서 조망하고 겸손히 연대하는 보편적 인간해방운동의 상태를 말한다.

주류 페미니즘은 다른이의 사회적 억압에 정말이지 무관심하다. 이를테면 주류 페미니즘은 모든 사회적 억압의 출발점인 계급 문제에 대해 정말이지 무관심하다. 그들은 아마도 여성이라는 계급이 일반적인 의미의 계급보다 더 근본적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과연 그런가. 페미니즘을 둘러싼 해묵고 아둔한 논쟁이기도 하지만, 여성의 억압이 근본적으로 계급에서 오는가 성에서 오는가는, '중산층 혹은 상류계급 여성이 하층계급 남성에게서 억압 받을 가능성'을 살펴보거나 '중산층 혹은 상류계급 여성의 억압과 하층계급 여성의 억압을 비교'해봄으로써 간단히 알 수 있다.

주류 페미니즘이 그런 저급한 사회의식에 머무는 실제 이유는 그 페미니즘의 주인공들이 작가, 언론인, 교수(강사) 따위 '중산층 인탤리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적 억압의 보다 분명한 피해자인 하층계급 여성의 고통을 이해할 만한 처지에 있지 않으며, 그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단지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사회적 억압인 성적억압을 '남성일반과의 문제'로 만드는 데 열중한다. 건강한 싸움보다 나른한 카타르시스에 익숙한 그들은 그들이 증오해마지 않는 남근주의를 넘어서기는 커녕 흉내내며(이를테면, 한 대중적인 페미니스트 잡지는 가수 박진영을 '먹고 싶은 남자'라 지칭한다), 심지어 투항한다(이를테면, 한 도발 전문'페미니스트는 정치적 남성인 생리적 여성을 대통령으로 밀자고 주장한다).

나는 성적억압의 실체인 가부장제가 전적으로 자본주의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는 덜떨어진 맑시스트가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본주의가 가부장제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가부장제의 기본 단위인 가족은,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기본 단위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좋은 여성'의 실제 임무는 오늘 노동력(남편)을 뒷바라지하고 다음 세대의 노동력(자식)을 양육하는 것이다. 자본은 남성에겐 노동의 일부라도 지불하지만 그들을 노동할 수 있게 뒷바라지하거나 양육하는 여성에겐 한푼도 지불하지 않는다. 자본의 입장에서 '좋은 여성'이란 얼마나 유익한가.

봉건사회의 관습인 듯한 가부장제가 근대사회(자본주의사회)에서 끈질기게 집행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 집행은 제도 교육, 미디어, 도덕 따위 이런저런 자본의 선전장치를 통해 마치 공기를 마시듯 뱃속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가부장제와 싸운다는 주류 페미니즘은 실은 그 선전장치의 성실한 일부다. 유한하기 짝이 없는 그들은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사회적 억압을 일반화하여 카타르시스하는 데 열중함으로써, 모든 여성이 제 억압을 통해 보편적 인간해방운동에 이르는 정당하고 필연적인 기회와 가능성을 성실하게 차단한다. 그 페미니즘은 그저 남근주의의 이면이다.(씨네21 2002/04/23)
2002/04/23 23:50 2002/04/23 23:50
2002/04/03 23:49
10여년 전, 재야 출신 국회의원의 보좌관 노릇을 하던 선배는"나중에 노무현이 대통령 선거에 나가면 발 벗고 뛸 거"라 말했다. 노무현은 처음부터 보기 좋았던 모양이다. 세월이 흘러 노무현은 대통령 선거에 나왔고, 이변이라 불릴 만큼 약진하고 있다. 노무현의 개혁 이미지는 대개 인정할 만한 사실이다. 그는 조선일보와 국가보안법에 공개 반대하고 지역주의에 당당히 맞선 유일한 정치인이다. 이른바 '비판적 지지'(어차피 당선 가능성이 없는 진보 후보를 찍어 죽은 표를 만드느니 좀더 나은 보수후보에게 표를 몰아주어 진보의 미래를 도모한다는)의 두번째 대상으로 그가 거론되는 건 그런 점에서 당연해 보인다.

'비판적 지지'의 첫번째 대상은 김대중이었다. 밝히자면, 나도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그렇게 했다. 비판적 지지론이 아닌 진보 독자 후보론을 주장하던 진영에 더 가까웠지만, 그래서 다들 내가 그렇게 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망설임 끝에 그렇게 했다. 진보진영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그렇게 했다. 드디어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었고 그에게 표를 몰아준 진보주의자들은 그의 개혁성에, 그의 개혁성을 통해 도모될 진보의 미래에 기대했다.

기대가 의구심으로 의구심이 다시 지루한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단지 몇 달이 필요했다. 나는 그 즈음 내가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김대중에 대한 실망의 원인은 김대중에게 있는 게 아니라 그에게 실망하는 진보주의자들에게 있었다. 어리석게도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인 김대중이 진보적이기를 기대했다. 실망에 찬 그들은 말하기를 김대중이 변했다고 했다. 그러나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김대중은 예나 지금이나 보수주의자이며 그의 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그의 이념에 충실하다. 김대중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기대는 그가 한국사회 보수영역의 마이너로서 한국사회 보수영역의 메이저인 파시스트들에게서 오랫동안 견제 받는 모습을 통해 생긴 판타지였다.

김대중에 대한 실망을 노무현으로 보상하려는 심정이야 인간적으로 이해 안가는 바 아니나, 정치적으로 가련하기만 하다. 노무현이 김대중보다 인격적으로 신뢰가 가는가. 나 역시 그래 보이지만, 개인의 인격이 정치를 좌우할 수 있다는 가설은 텔레비전 궁중사극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노무현의 판타지에 젖은 사람들은 오늘 김대중을 잠시 접고 옛 김대중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그는 한 때 오늘 노무현과는 비교가 안될 판타지를 가진, '선생'이라 불리는 정치인이었다. 노무현에게 남은 질문은 하나다. 노무현은 (개혁적) 보수주의자인가 진보주의자인가. 지역주의에 당당히 맞선 노무현은 신자유주의에도 당당히 맞서는가, 노무현은 하층계급의 싸움에 연대하는가.

김대중의 정치는 바보가 아닌 사람들로 하여금 이른바 나쁜 보수와좋은 보수의 차이가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특히 오늘처럼 극단적 파시즘이 이면으로 물러난 상황에선 더욱 더)을 충분히 깨닫게 할 만했다. 좋은 보수후보에 표를 몰아주어 진보의 미래를 도모한다는 노회한 전략은 한국 정치에서 진보의 지분(득표율, 혹은 국회의원 수로 계량할 수 있는)이 하다못해 '김종필의 당' 만큼이 되어, 캐스팅보트 노릇이라도 가능해진 다음에나 생각할 일이다. 진보주의자, 혹은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이 단 한명도 없는 세계 유일의 나라에서 진보주의자가 할 일은 오로지 '털끝 만큼이라도 진보의 지분을 늘이는 것'이다.

(중립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제 이념대로 순정하게 찍는 것, 그래서 한국정치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한국인들의 이념적 스펙트럼과 동기화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것만이 한국인들이 제 처지에 가장 적절한 정치를 맞을 유일한 방법이다. 네 이념대로 찍어라. 한국사회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면 가장 반동적인 보수후보를 찍어라. 한국사회의 표면적 악취라도 우선 덜고 싶다면 가장 개혁적인 보수 후보를 찍어라. 그러나 한국사회의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진지하게 바란다면 (당선 가능성을 절대 기준으로 한 이런저런 되지 못한 정치평론일랑 걷어치우고) 그저 가장 진보적인 후보를 찍어라. 진보에 외상은 없다, 네 이념대로 찍어라.(씨네21 2002/04/03)
2002/04/03 23:49 2002/04/03 23:49
2002/03/13 23:48
<까막눈 삼디기>는 부모를 일찍 잃고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초등학생 엄삼덕을 그린 동화다. 아이들은 이학년이 되도록 글자를 깨치지 못한 엄삼덕을 "까막눈 삼디기"라 놀려댄다. 씩씩한 연보라가 시골에서 전학 오고 엄삼덕을 돕기 시작한다. 며칠 전 이학년이 된 김단이 그걸 읽고 있길래내가 물었다. "단이 일학년 때 삼디기 같은친구 있었어." "응, 김은혜(가명)." "글자를 몰랐어." "글자도 모르고말도 잘 못하고 바지에 똥 싼 적도 있어." "그래서 친구들이 놀렸어." "친구들이 맨날 놀리고 남자애들은 때리고 그랬어." "뭐라고놀렸어." "바보 멍청이, 더러운 애라고." 김단은 기억이 새로운 듯 표정이 심각하다. "단이는." "난 은혜하고 친하게 지내고 은혜를 도왔어." "단이가 그랬어. 어떻게 도왔지." "너희들 그러면 나빠, 은혜도 우리와 같은 일학년이고 우리 친구야, 글자도 이제 곧 배울 거야, 그러고." "또." "때리는 남자애들 내가 때려주고." "단이처럼 은혜를 도와주는 친구가 또 있었어." "응, 한명, 아니 두명인가. 그런데 내 단짝 세 명이 은혜가 더러운 애라고, 더러운 애하고 놀면 나하고 같이 안 놀겠다고 해서..." 김단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흔히, 어른들(특히 배웠다는 어른들)은 어른들이 감당하는 거대 세계의 개념들을 아이에게 가르치고 아이가 그 개념과 관련한 실제의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착각하곤 한다. 아이에게 개념만을 가르치는 건 전혀 어려운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한 아이에게 미제국주의가 아프카니스탄 인민들에게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똑부러지게 말하게 만드는 데는 삼십분이면 족하다. 그러나 아이에게 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그리고 아직은 감당할 의무가 없는) 그런 거대 세계의 제국주의가 아닌 제가 감당하는 실제 세계(형제나 동무들 따위와의)에서 제국주의에 해당하는 것을 분별하고 반대하는 능력을 갖게 가르치는 데는 장구한 노력이 필요하다. 한 사람의 가치가 우주의 가치보다 덜하지 않다 말하듯 아이를 키우는 일은 마치 우주를 키우는 일과 같다.

사정은 그러한데, 용감무쌍하게도 나는 두 아이를 키운다. 아홉 살 먹은 여자 김단과 여섯 살 먹은 남자 김건. 나는 그들이 세상이 우러러보는 별난 사람으로 자라기를 눈꼽만큼도 바라지 않지만 세상의 공정함을 좇는 사람으로 자라기는 간절히 바란다. 나는 그들이 사람다운 사람으로 자라길 바란다. 자본주의적 이기심이 가장 고결한 품성으로 추앙되고 남의 것을 빼앗는 능력이 사회적 능력으로 설명되는 세상에서 사람다운 사람의 유일한 요건은 공정함을 좇는 것이라 나는믿는다. 나는 아이들에게 공정함을 좇는 습성(이어야 한다. 80년대 청년들의 경과가 보여주듯, 이십여년 동안 자본주의적 이기심의 범벅이 된 채 대학에서나 얻는 공정함의 추구는 어설픈 것이다.)을 길러주려 애쓴다. 그들의 모든 행동에 한껏 방임적인 나는 그 지점 부근에서 언제나 민감하고 긴장되어 있다. 세상은 이미 아이들에게 24시간 내내 남의 것을 빼앗아라 가르치고 또 되새긴다.

그런 미친 세상에서 아이에게 공정함을 좇는 습성을 갖도록 가르친다는 건 기나긴 게릴라전과 같다. 먹을 것이든 놀 것이든, 아이들의 작은 세계에서 소유 문제를 둘러싼 다툼이 발견될 때 나는 어김없이 개입한다. 잔뜩 골이 난 아이들을 달래가며 천천히 토론해 나가다보면 아이들은 결국 '남의 것을 빼앗는 놈은 나쁜 놈'이라는 결론을 스스로 내린다. 나쁜 놈은 사과하고 반성한다. 약한 친구를 괴롭히는 놈에게 꿇지 않고 맞서야 한다, 맛난 게 생겼을 때 다른 형제나 친구를 먼저 생각한다, 청소 따위 궂은 일을 할 때 빠지는 건 다른 사람에게 시키는 것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결론을 내려간다. 그들이 어른들과 다른 단 하나는 제가 내린 결론을 지키는 일을 명예로 안다는 점이다. 어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지키지 않는다. 나는 우주를 키우다 우주만큼 많은 내 위선을 깨닫는다.(씨네21 2002/03/13)
2002/03/13 23:48 2002/03/13 23:48
2002/02/27 23:47
한국에서 벌어지는 학술 심포지엄이니 토론회니 이름 붙은 행사들은대개 가장 진지한 형태의코미디들이다. 내 생각에, 한국의 학술이 갖는 내용과 수준은 도무지 그렇게 많은 심포지엄이나 토론회를 감당할 형편이 못 되는 것 같다. 그런 학술 행사의 목적이란(그런 행사가 내건 목적과는애당초 상관없이) 그런 학술적 행사의 개최나 참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개최와 참여 자체에 있다.

행사 진행이 예정 시간보다 늘어지고 있음이나 끊임없이 환기시키며 행사의 실제 목적을 벗어나지 않으려 분투하는 진행, 아무런 내용이 없거나 너무나 지당해서 새삼 발표할 이유가 없어보이는 발표, 이른바 학술계의 위계에 입각한 비굴한 아부와 타협의 이런저런 변형으로서 토론, 그리고 그 모든 코미디의 총화인 술잔을 휴지로 받쳐들고 분주히 사교에 몰두하는 리셉션!

잡글이나 쓰는 처지인지라 그런 코미디의 주최나 참여를 일삼지 않아도 되는 걸 천만다행이라 생각하지만 이런저런 인간적 인연들을 무작정 거스를 순 없어 빼고 미루다 가끔은 그런 공간에 불려나가기도 간다. 학술의 공간이 학자가 아닌 나를 부르는 이유야 늘 그 밥에 그 나물인 구성의 단조로움에 변화를 꾀하자는 것일 테고, 나 또한 발표니 토론이니 하는 행사의 알맹이에야 애당초 기대를 안 하고 그저 두어 시간 눈감는다 마음먹고 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놈의 방명록이 놓인 행사장의 입구에 들어설라치면 알 수 없는 낭패감이 밀물처럼 밀려오니 나도 참 어지간한 인간이지 싶다. 하긴 나이 마흔에 넥타이도 맬 줄 모르는 인간이 그리 많진 않을 테니.

불가사의한 자신감과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방자한 인간이라도 만나게 되면 본격적인 고통이 시작된다. 한국에서 가장 근거없이 안락하기에 가장 방자해진 직업인 교수들이 득실거리는 공간에서 그런 인간을 만나는 일은 오히려 필연이다. "오, 네가 그 김규항이란 놈이냐", 웃음 짓는 기름진 얼굴을 면전에 두고도 나를 오게 한 사람의 미래를 근심하며 눌러참고 돌아와선 "그런 자식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다니. 아무래도 내게 노예근성이 있는가" 하며 나는 끔찍해 하는 것이다.

이른바 진보적 성향의 학술 심포지엄이나 토론회에서 '더이상 진보적이지 않은 진보적 인사들'을 만나는 일은 좀더 고통스럽다. 10여년 전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으로 충만했고 그 덕에 이름을 알린 그들은, 진작에 그 신념을 버렸음에도 여전히 10여년 전 제 이력을 '사용'하며 진보적 인사로 행세한다. 그들의 그런 야비한 처신은 적어도 국민의 정부 이후 한국 인텔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우아하고 안락한 처신이다. 10여년 전 진보의 이력엔 더이상 탄압과 공포가 적용되지 않지만 그 이력은 오늘 그들의 명성을 유지하고 그들의 양심과 지성을 상징하기에 충분하다. 입으로나 신념에 충실한 내가 그들이 신념을 버린 일까지 참견하고 싶진 않지만 그들의 야비한 처신을 보노라면 그저 욕지기가 난다.

지난해 가을 이후 불려간 두번의 진보적 심포지엄은 그런 인사들로 가득했다. 난 예의 야비한 처신을 대대적으로 목도해야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제 처신을 둘러싸고 그들 나름의 공고한 협력체제를 확보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10여년 전 맑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스탈린주의자였던 한 교수는 은근슬쩍 '맑스주의의 오류'를 주장하고, 10여년 전 혁명의 박두를 노래하던 한 시인은 오늘 우리는 아무런 선택을 할 수 없는 정신적 카오스 상태에 있다 노래한다. 자신의 옛 신념의 근거를 부정하거나 자신의 정신적 공황을 일반화하는 일은, 그들의 야비한 처신을 강변하고 그 처신에 어떤 설명도 요구받지 않으려는 그들의 일치된 욕망에 봉사한다. 학술의 공간은 비로소 안도의 미소로 가득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누가 물을 때, 그들은 일제히 능글맞게 외친다. "다 알면서 뭘 그러셔."(씨네21 2002/02/27)
2002/02/27 23:47 2002/02/27 2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