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01 10:23
넬슨스와 보스턴 심포니의 쇼스타코비치 시리즈는 연주도 연주지만 감탄스러운 녹음 때문에 더 자주 듣게 된다. 타이달에 MQA 음원이 있다. 시리즈 중 두개는 '스탈린의 그림자 아래'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2015년과 2016년에 나왔는데 2015년의 1번 트랙이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1934)중 한 곡이다.
1936년 1월,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관람하던 스탈린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다. 다음날 프라우다엔 ‘부르주아적 혼돈’이라는 비판이 실리고 공연 금지 처분이 내려진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수많은 예술가들이 체포되고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완성한 교향곡 4번의 초연을 포기한다. 그리고 4개월 만에 교향곡 5번을 써낸다. ‘당의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답변’에 대해 당은 ‘낙관적 비극’이라는 호평을 내린다. 쇼스타코비치는 가까스로 위기를 빠져나온다.
교향곡 5번은 당시에도 혁명을 그린 음악으로 여겨졌고 여전히 그렇다. 누가 듣기에도 혁명의 전형적 과정과 이미지들(군중의 함성, 거대한 저항, 투쟁의 드라마, 위대한 승리 같은)이 그려진다. 그러나 5번엔 혁명을 망가트린 당에 대한 예술가의 조소도 숨겨져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제자인 로스트로포비치에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음악의 전사들이야. 어떠한 바람에도 꿋꿋이 살아남아 인간을 옹호해야 하는 전사들.”

여기에서 ‘어떠한 바람’을 반공주의적으로 빠져나가면 안 된다. 오늘 우리에겐 명백하게 ‘자본의 바람’이다. 쇼스타코비치에 따르면 '예술가는 자본의 바람에도 꿋꿋이 살아남아 인간을 옹호해야 하는 전사들'이다.
2018/11/01 10:23 2018/11/01 10:23
2018/10/31 18:00
사회주의에 대한 가장 결정적 오해는 사회주의가 ‘경제적 교의’라는 것이다. 자유주의/반공주의적 관점뿐 아니라 사회주의적 관점에서도 널리 공유되어 온 오해다. 오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극적이고 애석한 상황들을 만들어낸다.

자본주의는 빈부격차와 경제적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속성을 가진다. 이걸 아예 부인하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주의는 그 속성을 상당 부분 수정 보완할 수 있는 면모도 가진다. 경제적 평등이 목적이라면 굳이 사회주의를 생각하지 갖지 않고도 모색할 여지들이 있다. 경제적 평등이 목적이면서 그런 모색을 개량주의라 폄하할 필요도 없다.

물론 경제적 평등은 사회주의의 필수적 요소이며, 그걸 이루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사회주의의 목적은 오히려 경제적 차원을 넘어서는 데 있다. 자본주의의 물신숭배 현상은 인간의 삶을 경제적 차원에 결박함으로써, 인간 영혼을 갉아낸다. 사랑, 존경, 교육, 철학, 예술, 종교 등 인간을 비로소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것들이 껍질로 남는다.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은 그로 인한 필연적 허무와 우울을 덮기 위해, 경쟁에 몰두하거나(우파적 노력) 나보다 더 껍질만 남은 인간을 찾아낸다(좌파적 노력).

문제는 물신숭배 현상이 단지 지배계급이 심어준 이데올로기(허위의식)이거나 상부구조 고유의 심리적 윤리적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신숭배는 상품에 ‘달라붙어’ 나오며, 모든 게 상품의 형태로 교환되는 사회 구조에선 누구도 회피할 수 없다. 탐욕스러운 자본가는 물론, 노동자라고 해서 본원적 면역력(루카치가 말한 ‘노동자 계급의 귀속 의식’ 같은)을 갖지 않는다. 굳이 사회주의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사회주의는 경제적 교의가 아니라 ‘영적 회복’에 관한 일이다. 사회주의의 목적은 경제적 차원에 결박된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걸맞은 위엄을 회복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에 대한 가장 첫번째 질문은 ‘사회주의는 가능한가?’가 아니다. ‘나는 사회주의자인가?’이다.
2018/10/31 18:00 2018/10/31 18:00
2018/10/27 15:36
논리적 인과관계에 밝은 사람일수록 감정의 인과관계에 약한 경향이 있다. 감정의 인과관계를 ‘감정에 대한 논리적 인과관계’로 치환하려 들기 때문이다. 논리적 인과관계에 밝은 사람은 똑똑하지만, 감정의 인과관계에 밝은 사람은 사랑할 줄 안다.
2018/10/27 15:36 2018/10/27 15:36
2018/10/21 21:32
“거창한 거대담론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일상의..”  한국 인텔리들, 특히 좌파 인텔리들이 즐겨 사용하는 설레발이다. 그들은 이런 식의 ‘거대담론 혐오’를 지적이고 세련된 태도의 증빙처럼 여기는 듯하다. 딱한 일이다.

20세기 중반 서유럽 좌파는 난감한 현실에 맞닥트린다. 유토피아적 기대에 부풀었던 러시아혁명은 스탈린주의로 귀결하고, 소련군은 헝가리 혁명을 진압했으며, 노동조합은 조직력을 가질수록 혁명성을 갖는 게 아니라 체제내 중산층화하고, 자본주의는 ‘자동 붕괴’되긴커녕 자기 수정 능력(케인즈주의와 복지 국가)을 보였고, 미국의 대량소비 체제와 인민의 의식과 감각을 장악한 대중문화산업은 그들의 상상을 벗어났다.

그들이 현실 변혁을 원하는 좌파라면 그런 현실 앞에서 그들이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일은 자신들의 오류를 성찰하고(다음에 적겠지만, 그들이 받은 충격은 대부분 맑스주의에 대한 몰이해에 기인한다.), 치열한 사유와 토론을 통해 현실에 대한 대응력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책임을 ‘맑스주의의 본원적 오류’로 돌리고 대대적인 현실 도피에 들어간다. 그들은 거대담론이나 지배의 거시성, 자본주의 경제적 토대 분석 등을 포기하고 지배의 미시성, 문화와 상부구조만 다루기로 한다. 그들은 그 대가로 제도 학술계와 지식시장에서 안정을 누리게 된다. 즉 그들은 시스템과 거래했다.

지배시스템은 거시성('계급' 같은)과, 미시성(‘정체성’ 등 계급으로 포획되지 않는)을 동시에 갖는다. 지배의 거시성은 미시성과 결부되어 작동하며, 지배의 미시성은 거시성과 결부되어 작동한다. 사실 둘은 지배시스템을 분석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틀일 뿐 분리할 수 없는 한 몸이다. 거대담론과 미시담론은 둘 중 하나를 부정하면 전체가 무너지는 구조라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의 좌파 경향 인텔리들이 ‘거대담론 혐오’를 지적이고 세련된 태도의 증빙처럼 여기게 된 건, 오류도 도피도 거래도 아니다. 서유럽의 모범적 지적 식민지인 한국의 좌파 인텔리들에게 중요한 건, 맥락과 역사가 아니라 ‘따라하기’다. 인텔리란, 자신의 사유로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을 수치스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다.
2018/10/21 21:32 2018/10/21 21:32
2018/10/14 19:52
오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가 모든 사람에게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만 가난한 사람은 무엇 하나 구현할 수 없는 상황은 ‘경제적 불평등에 의해 자유가 침해된 상태’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그런 상태야말로 자본주의적 자유의 본 모습이다. 자본주의에서 ‘자유’ 개념은 ‘사적 소유’ 개념과 한몸으로 생겨났다. 존 로크를 비롯한 초기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선 일정 수준의 재산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들은 재산이 없는 사람은 자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에서 자유란 누구나 구입할 권리가 있지만 돈이 없으면 구입할 수 없는 ‘상품’이다. 예컨대 ‘느리고 생태적인 삶’은 돈과 관련없이 세계관과 삶의 철학에 의거하여 누구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당한 재산이 있거나 안정적 지대 수입을 가진 사람만이 구현할 수 있다. 부지런히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 ‘느리고 생태적인 삶’을 구현하려 들면 생존의 위기에 직면한다. 그것은 시스템의 응징이다. ‘느리고 생태적인 삶’은 자본주의의 승자들을 위한 ‘특별 상품’에 속한다. 승자들은 그 상품들 덕에 ‘교양미’ ‘지성미’ ’존경’ 같은 일반적 소비로 얻기 어려운 특별한 효용을 얻을 수 있다.
2018/10/14 19:52 2018/10/14 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