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27 16:30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커피를 못 먹겠는 걸 보면 전보다는 제법 커피 맛을 알게 된듯하다. 카페에선 대개 라테를 사 먹는다. 연희, 동교, 합정 등에 자주 가는 몇 개의 카페가 있다. 작업실에서는 언제나 에스프레소다. 코만단테 그라인더(전동 그라인더와 맛의 차이를 확연히 구분할 줄 안다기보다는 이 기계가 마음에 들어 쓴다)로 콩을 갈아 모카포트 브리카로 추출한다. 콩은 이코복스 가로수길점에서 사는데 떨어져 갈 무렵 강남 갈 일이 있을 때 들르거나 친구에게 부탁했다. 얼마 전 우주소년과 전광수커피가 세계문학 커피를 내놨다고 해서 이걸 한번 사 먹어봐야겠다 싶던 참에, 우주소년 박우현 선생이 보내주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커피. 마초 작가는 영 취향이 아니지만(난 스스로 병들어 세계의 병듦을 드러내는 작가가 좋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처럼) 커피는 꽤 마음에 든다. 짙고 깊으며, 시지 않다.
2019/04/27 16:30 2019/04/27 16:30
2019/04/26 10:51
정태춘・박은옥 40주년 공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많은 사람이 가수 정태춘・박은옥을 굳이 ‘예술가’라 부르는 건 그들 노래에 담긴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사유 때문일 겁니다. 사유는 개인의 내면적 성찰에서 출발하여 민족이나 계급과 같은 사회적 지평으로 확장되며 깊이를 더해갔습니다. 그 어느 지점에선가 우리는 동행하길 멈칫거렸고, 그들은 노래를 멈추었습니다.

예술가는 가장 전위적인 존재입니다. 예술가는 ‘제한 없는 상상력’(정태춘의 표현으로 ‘무책임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세계를 그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관객이나 청중과의 동행으로 구현됩니다. 바로 그래서, 때로는 ‘예술의 중단’이 예술가가 전위성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40주년 공연’은 정태춘・박은옥과 우리가 오랜만에 주고받는 편지와 같습니다. 중년의 관객은 이 공연이 빛나는 젊은 시절을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일 겁니다. 또한 우리는  근래 제 나라를 스스럼없이 ‘헬조선’이라 말하는 젊은 시민들이 정태춘・박은옥의 노래에 깊은 인상을 받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단지 ‘좋은 옛 노래’를 발견한 게 아닙니다. 노래의 전위성은 ‘현재성’으로 살아납니다.

특별한 예술가들이 대개 그렇듯 정태춘은 제 안에서 이야기가 샘솟는 이입니다. ‘40주년 프로젝트’가 잘 치러진 후 노래 만들기를 멈춘 그로 돌아간다 해도, 인간과 사회 현실에 반응하는 이야기는 식지 않을 것입니다.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 바로 우리를 통해 노래는 지속됩니다.

정태춘・박은옥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 위원장 김규항


(정태춘・박은옥 40주년 공연 팸플릿 인사말)
2019/04/26 10:51 2019/04/26 10:51
2019/04/22 08:37
임금이 높고 안락한 삶을 살아가는 노동자가 자신이 ‘임금 노예’라 생각하긴 어렵다. 아예 노동자라는 생각도 안 할 가능성이 높다. 로마인들은 노예에 대한 가장 직관적 정의를 남겼다. ‘제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자.’  인간이 제 운명을 만들어가는 방법은 노동이며, 자유인인가 노예인가는 노동의 자율성과 타율성에 있다. 고대 노예라고 모두 채찍을 맞아가며 가혹한 노동에 시달린 건 아니다. 시를 낭송하고 연극을 하고 건축을 하는 예술가 노예도 있었고, 로마의 교사 노예에겐 자유인 학생에 대한 일정한 체벌까지 허용되었다. ‘고급 노예’는 교육 수준이 높았고 가난한 자유인보다 안락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의 의지와 명령에 따라 타율적 노동을 수행하는 노예였다. 다만 여느 노예와 삶의 외형적 격차 때문에 자신이 노예임을  자각하기 어려웠을 뿐이다. 오늘의 고급 노예들이 그렇듯 말이다.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는 두가지 소망을 갖는다. 고급 노예가 되는 것, 친절한 주인을 만나는 것. 전자는 오늘 부모들의 소망이자 교육의 목표다. 후자는 어떤가? 오스카 와일드는 ‘친절한 노예주는 최악의 노예주’라 갈파한 바 있다. 노예로 하여금 노예임을 자각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노동 해방’은 많은 경우 ‘노예의 두가지 소망’으로 오해되곤 한다. ‘노동 해방’은 노예가 자유인이 되는 일이다. 물론 그 일은 자신이 노예임을 자각하는 노예로부터 시작된다.
2019/04/22 08:37 2019/04/22 08:37
2019/04/21 12:55
예수의 부활은 육체의 죽음 후에도 다시 살아난다는 희망을 주려는 쇼가 아니다. 신앙심이 깊은 어떤 사람도 그런 희망을 걸진 않는다. 예수의 부활은 오히려 우리가 육체로만 살아있음에 대한 환기이며 질문이다. 예수는 육체의 죽음을 극복해보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영적 존재’로서 삶을 잊고 있음을 되새기게 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마지막 사건인 부활은 그의 첫 사건인 ‘메타노이아(삶의 전면적 전환) 요청’과 연결된다. ’영적 존재로서 삶’이란 현실을 초월한 어떤 삶이 아니다.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삶’을 의미한다. ‘자유’는 단지 법적 형식적 차원을 넘어 ‘자율적 삶’이며 그 뼈대는 당연히 ‘노동의 자율성’에 있다. ‘개인’은 고립된(외로운) 인간이 아닌 독립된(고독한) 인간이다. 누구에게도 의탁하지 않는 ‘삶의 사상가’이자, 그 연합으로서 세계의 주인이다.
2019/04/21 12:55 2019/04/21 12:55
2019/04/20 21:42
영화 <더 세션>을 봤고 대사가 남았다.

“사랑을 하면 어떤 일이 생기죠?”
“서로에게 시를 쓰고 섹스를 하죠.”

그래, 우리는 사랑을 하면 서로에게 시를 쓰고 섹스를 한다. 더 이상 섹스하지 않게 될 때 우리는 사랑이 식었음을 안다. 하지만 우리는 시가 섹스보다 먼저 사라졌음은 알지 못한다.
2019/04/20 21:42 2019/04/20 2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