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22 08:37
임금이 높고 안락한 삶을 살아가는 노동자가 자신이 ‘임금 노예’라 생각하긴 어렵다. 아예 노동자라는 생각도 안 할 가능성이 높다. 로마인들은 노예에 대한 가장 직관적 정의를 남겼다. ‘제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자.’  인간이 제 운명을 만들어가는 방법은 노동이며, 자유인인가 노예인가는 노동의 자율성과 타율성에 있다. 고대 노예라고 모두 채찍을 맞아가며 가혹한 노동에 시달린 건 아니다. 시를 낭송하고 연극을 하고 건축을 하는 예술가 노예도 있었고, 로마의 교사 노예에겐 자유인 학생에 대한 일정한 체벌까지 허용되었다. ‘고급 노예’는 교육 수준이 높았고 가난한 자유인보다 안락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의 의지와 명령에 따라 타율적 노동을 수행하는 노예였다. 다만 여느 노예와 삶의 외형적 격차 때문에 자신이 노예임을  자각하기 어려웠을 뿐이다. 오늘의 고급 노예들이 그렇듯 말이다.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는 두가지 소망을 갖는다. 고급 노예가 되는 것, 친절한 주인을 만나는 것. 전자는 오늘 부모들의 소망이자 교육의 목표다. 후자는 어떤가? 오스카 와일드는 ‘친절한 노예주는 최악의 노예주’라 갈파한 바 있다. 노예로 하여금 노예임을 자각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노동 해방’은 많은 경우 ‘노예의 두가지 소망’으로 오해되곤 한다. ‘노동 해방’은 노예가 자유인이 되는 일이다. 물론 그 일은 자신이 노예임을 자각하는 노예로부터 시작된다.
2019/04/22 08:37 2019/04/22 08:37
2019/04/21 12:55
예수의 부활은 육체의 죽음 후에도 다시 살아난다는 희망을 주려는 쇼가 아니다. 신앙심이 깊은 어떤 사람도 그런 희망을 걸진 않는다. 예수의 부활은 오히려 우리가 육체로만 살아있음에 대한 환기이며 질문이다. 예수는 육체의 죽음을 극복해보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영적 존재’로서 삶을 잊고 있음을 되새기게 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마지막 사건인 부활은 그의 첫 사건인 ‘메타노이아(삶의 전면적 전환) 요청’과 연결된다. ’영적 존재로서 삶’이란 현실을 초월한 어떤 삶이 아니다.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삶’을 의미한다. ‘자유’는 단지 법적 형식적 차원을 넘어 ‘자율적 삶’이며 그 뼈대는 당연히 ‘노동의 자율성’에 있다. ‘개인’은 고립된(외로운) 인간이 아닌 독립된(고독한) 인간이다. 누구에게도 의탁하지 않는 ‘삶의 사상가’이자, 그 연합으로서 세계의 주인이다.
2019/04/21 12:55 2019/04/21 12:55
2019/04/20 21:42
영화 <더 세션>을 봤고 대사가 남았다.

“사랑을 하면 어떤 일이 생기죠?”
“서로에게 시를 쓰고 섹스를 하죠.”

그래, 우리는 사랑을 하면 서로에게 시를 쓰고 섹스를 한다. 더 이상 섹스하지 않게 될 때 우리는 사랑이 식었음을 안다. 하지만 우리는 시가 섹스보다 먼저 사라졌음은 알지 못한다.
2019/04/20 21:42 2019/04/20 21:42
2019/04/19 18:11
같은 맥락에서 또 하나의 착각은 ‘근대적 개인’(자유로운 개인)을 ‘자본주의적 개인’(자유주의적 개인)이라 여기는 것이다. 이런 착각은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어 온 사회에서 20세기 후반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군사 파시즘과 전근대적 습속이 결합한 극단적 집단주의에 시달린 한국인이나, 러시아와 동유럽 등 공산주의를 참칭한 전체주의에 시달린 인민들이 대표적이다. 두 사회의 인민은 오랫동안 ‘자유’와 ‘민주’를 갈구했다. 그러나 예의 두가지 착각의 덫을 극복하진 못했다. 두 사회에서 자유화와 민주화는, 견제 없는 자본화로 귀결했고, 개인들은 집단주의의 억압에서 풀려난 대신 자유주의적 개인으로 흐트러져 각자도생의 바다를 부유한다.
2019/04/19 18:11 2019/04/19 18:11
2019/04/19 08:27
근대와 자본주의가 같다고 보는, 혹은 자본주의가 근대를 실어다 준다고 보는 착각이 만들어낸 대표적 참상이 현재의 한국과 중국이다. 자본주의는 이전 사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생산력을 비약시킴으로써 근대의 물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좀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는 근대를 ‘경제 환원’하는, 근대성을 잡아먹는 속성을 갖는다. 서구 사회의 근대적 면모는 자본주의가 저절로 실어다 준 게 아니라, 자본주의와 투쟁과 견제로 만들어졌다. 박정희로 본격화한 한국의 근대화 운동과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성으로 본격화한 중국의 근대화 운동은 이 사실에 대한 철저한 몰이해에 기반했다. 결국 두 사회는 소망대로 ‘경제 대국’이 되는 데 성공했지만, 인간의 삶과 관련한 모든 것들이 경제 환원된 끔찍한 사회로 귀결했다. 예컨대 오늘 한국인들이 제 나라를 ‘지옥(헬조선)’이라 부르는 건 예전보다 가난해져서가 아니다.
2019/04/19 08:27 2019/04/19 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