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05/12 16:08
대학로에 춤 공연을 보러 나갔다. 초대권으로였지만 영화고 연극이고 이른바 예술 감상을 못한 지가 1년이 넘는 나로서는 오랜만의 즐거운 외출이었다. 올해로 다섯 번째인 '민족춤 제전'은 출품작들의 수준이 비약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주제 의식에 대한 강박이 없어졌다는 점이 춤 언어를 세련되게 만들었고 보는 사람을 안심하게 했다. 행사를 꾸린 김채현 선생에게 "민족춤 같지 않네요."라는 농을 던지며 유쾌하게 웃을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자못 문화적 포만감에 젖어 극장 밖으로 빠져 나오는 순간 가까운 곳에서 굉장한 음량의 음악과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예정에도 없던 공짜 라이브를 건지는구나 하는 생각에 다가가 보니 수백 명의 교복들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머리를 가지각색으로 물들이고 헐렁한 옷을 입은 10대들이 댄스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또 하나의 춤공연이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대로 된 조명도 없이 민족춤 제전이 열리는 문예회관 대극장의 외등에 의지하는 소박한 공연이었지만 그 열기는 대단했다. 대략 열 명쯤인 댄서들이 군무를 하다가 한 명씩 앞으로 나와 묘기에 가까운 애드립을 할라치면 수백 명의 교복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댄서들 가운데는 그쪽에서 꽤 알려진 친구들도 있는지 "삼식이 오빠 짱이야!" 하는 실명이 들어간 고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의 공연은 용감하고 당당해 보였으며 그들의 댄스는 건강하고 아름다웠다. 그들을 가르치는 어른들이 같은 곳에서 판을 벌인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 썰렁함과 퇴폐에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은 자꾸만 헤벌쭉 벌어지는 입을 내내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러다 나는 문득 긴장했다. "댄스음악을 다시 봐야겠다. 저 친구들한텐 그게 록이었구나."

대중문화를 말하는 사람들은 댄스음악이 판치는 현실, 10대들이 댄스음악에 경도 되어 있는 현실에 대해 우려한다. 거기에는 장르의 편향성에 대한 우려 말고도 댄스음악이라는 장르의 뒤편에 숨겨진 음험한 상업성에 대한 비판도 들어 있을 것이다. 나만해도 웬만하면 한 주에 한번쯤은 가요 프로그램을 보고 싶지만 양파 까듯이 반복되는 댄스음악을 견뎌내지 못하고 번번이 포기하고 마는 처지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댄스음악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해야겠다. 1. 댄스음악은 누구의 것인가? 10대들이다. 2. 그들이 댄스 음악을 선택한 이유는? 춤추기 위해서이다. 3. 그들은 왜 춤을 추는가? 그냥, 좋아서. 4. 굳이 복잡하게, <시네21> 독자들 수준으로 얘기하면? 그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로부터 '탈출'하고 그들을 억압하는 기성세대와 주류사회에 '저항'하기 위해서...

댄스음악은 록이 아니다. 그러나 록을 진정한 록일 수 있게 하는 이유가 이른바 록정신에 있다면, 다름 아닌 탈출과 저항의 정신에 있다면 98년 한국의 틴에이저들은 댄스음악으로 록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들이 원전(미국 대중음악사)을 따르지 않고 그들만의 록으로 댄스음악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한국의 10대들의 정서가 많이 서구화되었다곤 하지만 여전히 록까지는 아니어서일 수도 있고 그들의 사회적 처지가 60년대 미국 노동계급의 10대들과 달라서 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대중음악사가 이 나라에서 똑같이 반복되어야 할 어떤 이유라도 있는가.

댄스 하는 그들, 대한민국의 10대들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나. 이른바 기성세대와 주류사회는 그들을 위해 어떤 세상을 준비해 놓았나. 모든 갓난아이들이 20년 동안 오로지 대학입시라는 이름의 '계급 결정시험'만을 위해 살도록 정해진 대인국에서 바로 그 '계급 결정시험'을 목전에 둔 10대라는 소인들이 춤을 춘다. 그들의 적은 그들을 뺀 전부이며 그들은 댄스로 록을 한다. 끝없이 탈출하고 무작정 저항한다. 그들은 예술의 사회성을 모르며 역사적 전망을 모르며 어떤 종류의 전략도 가지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록정신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록정신으로 충만하다. 그들의 댄스를 막지 마라. | 씨네21 1998년_5월
1998/05/12 16:08 1998/05/12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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