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04/06 16:30
전세계 영화인들의 저주와 전세계 영화팬들의 찬미를 먹고사는 20세기의 에덴 동산, 할리우드의 연례 재롱잔치. 오스카 수상식은 보는 사람의 오감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 모든 할리우드 장르 영화의 온갖 컨벤션들을 화사하게 배열한 최고급 종합선물이다. 오스카 수상식은 서너 시간 넘어 하기 때문에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는 버릇을 가진 나는 챙겨보지 않아도 해마다 보게 된다. 그리고 매번 쇼가 무르익을수록 볼거리가 쌓여갈수록 불편함도 같이 쌓여 간다. 자본주의를 거부하기로 한 내가 자본주의의 꽃을 감상하고 있기 때문이며, 전세계 피압박 영화를 지지하기로 한 내가 가해 영화의 자축연에 참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카는 자족적인 불편함에 기대어 구경을 지속하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메뉴까지 준비한다. 올해의 메뉴는 엘리아 카잔의 공로상 수상.

알다시피, 엘리아 카잔은 빨갱이 사냥이 극에 달한 1952년, 이른바 하원 반미행동조사위원회에 나가 자신이 좌파임을 시인하고 동료 8명을 밀고했다. 카잔은 54년 <워터프론트>로 오스카 감독상을 받는 등, 영화와 연극을 넘나들며 활동을 계속했지만 '밀고자'로 손가락질 받아왔다. 그를 불리한 처지로 몰아넣은 건 그 자신이었다. 카잔은 52년 하원 증언을 마친 직후 '공산주의는 위험천만한 적들의 음모'라는 광고를 <뉴욕타임스>에 싣는가 하면, 88년 발간한 회고록에선 "그런 기회가 또 다시 오더라도 똑같이 명예로운 행동을 하겠다"고 밝히는 배 째라 식의 행태를 보여왔다.

72년, 좌파라는 이유로 미국에서 쫓겨나 20년 동안 망명생활을 해오던 찰리 채플린이 '영화를 20세기의 예술이게 한 공적'으로 오스카 공로상을 받았다. 채플린의 공적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그 상은 할리우드가 매카시즘의 피해자에게 정중하게 용서를 구하는 절차이기도 했다. 영화 <채플린>에 묘사된 대로, 채플린이 83세의 노구를 끌고 입장하자 할리우드 영화인들은 열광적인 기립 박수를 보냈고 채플린은 눈물을 흘렸다.

오스카가 FBI에 의뢰해서 좌석 배분을 한 걸까. 카잔이 입장했을 때, 객석의 오른쪽은 거개가 기립했지만 왼쪽은 팔짱을 끼고 있거나 박수치지 않았다. 머리가 비었을 거라 여겨지던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만만치 않은 사회의식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일이었고, 역사 속에서 '이미 확보된 이성'이 '우상이 남긴 상처'를 지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카잔은 "아카데미의 용기와 관용에 감사한다"는 짤막한 인사말을 하고 서둘러 퇴장했다.

<조선일보>는 그 일을 두 번 언급했다. "엊그제 열린 7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엘리아 카잔 감독이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매카시 광풍에 의해 채플린이 추방된 1952년, 카잔 감독은 자신의 동료였던 공산당원들의 이름을 의회 청문회에 밝혀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카잔의 원죄는 '마녀 (공산주의자) 사냥'이 극에 달했던 52년,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동료 영화인 8명을 밀고한 것."

도무지 <한겨레>와 구분할 수 없는 이 공평무사한 표현은 <조선일보>와 그들의 보수 사상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들은 왜 52년 미국의 메카시즘을 '광풍'이며 '마녀사냥'이라고 하면서, 오늘 한국의 '광풍'과 '마녀사상'을 요구하는 걸까. 그것은 그들의 보수 사상이 세상을 판단하는 신념체계가 아니라, 가진 것을 내놓지 않으려는 혹은 더 많이 가지려는 동물적인 욕망 체계이기 때문이다. 52년 미국의 메카시즘은 내 돈궤하고 아무 상관이 없지만, 오늘 한국의 메카시즘은 내 돈궤를 보존하거나 늘리는 일인 것이다. 새삼스런 얘기지만, 보수 사상이 진보 사상과 대립한다 해서 보수 사상을 진보 사상과 같은 층위에 놓는 일은 터무니없다. 그것은 순수한, 매우 순수한 욕망이다. | 씨네21 1999년_3월
1998/04/06 16:30 1998/04/0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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