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12/30 17:27
이장호의 <바람불어 좋은 날>과 장이모의 <인생>을 비디오 테이프로 떠놓고 수시로 보는 건달이 올해 본 영화들에 적어 본 건달의 2백자평. 건달은 자발적으로 극장에 가는 일이 거의 없고(늘 뒤늦게 비디오로 보고) 꼭 봐야 할 영화를 빠트리기 일쑤(올해의 예로는 JSA)이나, 영화는 물론 모든 예술 작품 평가에 객관성이나 권위 따위는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는 나름의 고집도 있다.

<박하사탕>. 초록물고기를 보며 눈물을 훔쳤던 건달은 이 저명한 영화에 적잖이 실망. 모범생 출신들에게 벅찬 감동을 줄 만한 지점이 세상의 쓴맛을 조금이나마 보아 온 건달에겐 피할 수 없는 거북함으로 다가왔다. 건달 생각에 이창동은 열등한 예술 장르 한국영화를 적어도 한국소설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감독이지만 <박하사탕>을 세상의 상찬만큼은 인정할 순 없다. 이창동의 다음 영화를 기다리게 하는 영화.
<오 수정>. 건달 생각에 홍상수적 리얼리즘은 리얼리즘 너머의 리얼리즘. 홍상수적 리얼리즘이 포획하는 현실은 현실 속의 전형적인 지점을 취해 보다 전형적인 현실로 제시하는 리얼리즘 방법론으로 포획 불가능한 자디잔 현실들이다. 홍상수가 제 영화에 사회를 담지 않으려 하지 않는 건 사회적 손실이고 건달을 약오르게 하지만 <오 수정>은 어떤 사회파 영화보다 건달을 사회적으로 번민하게 한다. 영화에 지고도 즐거운 영화.

<주유소습격사건>. 어떤 자식이 이 영화에 현실성이 없다고 했던가. <주유소습격사건>이라는 우화는 온통 가슴 저린 현실성을 기반으로 한다. 어떤 자식이 그 청년들이 '그냥' 주유소를 습격한다고 비난했던가. 주유소는 한국의 은유이며 그 청년들이 '그냥' 주유소를 습격하는 유일한 이유는 한국이 '그냥' 습격 당할 만한 곳이라서다. 고개를 숙여 한국의 하반신을 보라, 과연 그러하지 않은가. 어른을 위한 정치 동화의 가능성을 지닌 영화.

<반칙왕>. 한국제 예술작품의 최대 결점은 문명비판적 통찰. 김지운은 언젠가 채플린의 페이소스를 한국화하는 데 성공할 지도 모른다. 마스크를 쓴 한 사무직 노동자 청년의 프로레슬링 에피소드를 통해 유례없는 천민 자본주의와 유례없는 전근대 정신에 사로잡힌 한국 사회를 조롱한다. 장항선이라는 최고의 캐릭터 배우와 왕정이었다면 작위를 받았을 신구라는 장인 배우를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건달을 행복하게 하는 영화.

<하면 된다> 종로에서 만난 후배 건달의 영화나 보자는 제안에 나쁘지 않은 코미디라는 <씨네21> 기사의 기억으로 화답했다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남긴 영화. 이 영화에 지뢰 표지를 붙이지 않은 걸 보면 <씨네21>은 바야흐로 영화판의 조선일보로 가고 있는지도. 건달 생각에 영화는 90분이 필요한 영화와 90분이 필요하지 않은 영화로 나뉘는 바 이 영화는 후자의 모범이다. 몇몇 배우들의 분투와 선배가 고른 영화에 비위를 맞추려는 후배 건달의 분투만이 눈물겨웠던 용서할 수 없는 졸작 영화.

<다찌마와 리> 건달은 건달을 알아보는 법. 가방끈이 짧다는 류승완의 신분적 장점은 대중의 감성으로 대중에게 다가가는 류승완의 작가적 강점과 직렬한다. 건달 정신은 모범생의 머리통을 통과할 때 키치라 불리는 박제가 되고 건달 청년의 몸을 통과할 때 살아 숨쉬는 예술이 된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 대한 모범생들의 주제넘은 극성에 쑥떡을 먹이는 류승완의 흐뭇한 소품. 이름하여 한국 근대 건달 박물관 영화.

2백자평 후기. 자발적으로 극장에 가는 일이 거의 없는 건달이 애니메이션들만큼은 모조리 극장에서 본 이유는 건달의 딸이 그 애니메이션들의 비디오 출시를 기다릴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벅스 라이프> 정도면 비디오로 보긴 아까운 데가 있기도 했거니와, 내년부턴 애니메이션이 아니어도 극장에 자주 나가리라 건달은 결심했다. | 씨네21 2000년_12월
2000/12/30 17:27 2000/12/30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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