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12/07 17:26
한국을 대체 불가능한 낙원이라 여기는 한줌의 지배계급을 빼고라면, 한국은 절망적인 나라다.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어떤 부분도 한국인이 한국에서 일생을 보내야 할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대개의 한국인들이 한국에서 일생을 보내는 일을 달리 생각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한국에서 일생을 보내는 방법 외의 다른 선택을 고려하지 않는 습성 때문이다.

모든 한국인이 박정희의 병사이던 시절 한때 미국 이민이 유행이었다. 박정희의 어린 병사인 나는 그런 이민자들에 반감이 컸는데, 그들이 한국을 떠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한국(당시엔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을 탈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박정희의 어린 병사답게 공산군과 싸우지 않고 도망하는 그들의 비겁함이 싫었던 건지까진 기억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그 후 내게 이민이란 늘 언짢은 일이었고 한국에서 일생을 보내는 일은 내게 늘 당연했다.

내가 생각을 달리하게 된 건 올 들어 내 딸 김단이 일곱 살이 되면서, 나를 아비로 둔 두 아이 가운데 하나가 한국의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일이 불과 일년 앞으로 박두하면서다. 한국에서 한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는 건 그 아이가 본격적으로 한국인의 삶에 접어든다는, 그 아이의 일생이 급기야 기나긴 절망 속으로 빠져든다는 뜻이다. 정말이지 한 아이를 한국의 학교에 들여보내는 일은 아무래도 사람이 할 만한 짓이 아니다.

물론 다른 선택도 존재한다. 사립초등학교는 아무래도 공립초등학교보다 덜 야만적일 거고 열린교육을 하는 중고등학교는 대개의 한국 아이들이 들어가는 중고등학교들보다 분명히 낫다. 쌓아 놓은 돈이 더 있다면 아이를 일찌감치 외국으로 보내는 방법도 있다.(이 방법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돈과 학벌이 신분을 결정하는 한국에서 그 아이는 출국심사대에 서는 순간 낙원의 문턱에 이른다.)

문제는 내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런 선택을 감당할 수 없는 내 형편은 물론이려니와, 설사 그럴 형편이 된다 해도 나는 졸렬하나마 진보주의자 노릇을 하며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진보주의자란 세상을 뜯어고치자는 의견을 갖는 사람이고 세상을 뜯어고치는 일이란 현재 세상에서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 서는 일을 출발점으로 한다. 그 출발점에 제 삶의 조건을 억압받는 사람들의 삶의 조건으로 제한하는 진보주의자의 숙명적인 도덕률이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진보주의자(혹은 진보주의자 노릇을 하는 자)는 제 아이를 제 사는 동네의 대개의 아이들이 들어가는 학교에 들여보낼 수밖에 없다.

내 일생을 보내는 한 방법으로 이민이 등장한 건 지난여름 어느 날 후배 녀석에게서 캐나다 벤쿠버의 무색무취한 삶 이야기를 듣고서다. 주 5일 노동으로 먹고사는 일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집을 마련하는 데 반생을 바칠 필요가 없다는, 교육과 의료가 무료이며 도무지 세상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다른 이의 삶에 대해 간섭하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광활한 자연 곁에서 조용히 살아간다는, 벤쿠버의 무색무취한 삶은 이민에 대해서라면 어린 시절의 반감만 존재하던 나를 뒤흔들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곳이 녀석의 말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곳이라도 된다면 그곳에 가서 내 아이를 그곳의 학교에 보내고 조용히 일생을 보내는 것도 방법이겠구나. 내가 써내는 졸렬한 글쪼가리들이 세상에 주는 유익이 실재하는진 분명치 않지만 그곳에 가면 내 두 아이의 삶에 주는 유익은 분명히 실재하는구나. 그 두 아이를 희생시키며 졸렬한 진보주의자 노릇을 하며 사느니 한국을 깨끗이 포기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구나.

한동안 꿈을 꾸듯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나가던 나는 불현듯 오늘 내가 도무지 이민 따윌 꿈꿀 만한 형편이 아니라는 사실과 앞으로도 그럴 형편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적다는 사실을 깨닫고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이민은 일생을 보내는 한 방법으로 내 머리통 한켠에 남았다. | 씨네21 2000년_12월
2000/12/07 17:26 2000/12/07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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