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10/27 17:23
여섯 살부터 초등학교 4학년초까지 살던 대구의 그 마을은 시내 나갈 때면 "대구 간다"고 하는, 과수원을 가진 한두 집을 빼곤 살림살이가 형편없는 대구의 동쪽 끝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초 어느 날 담임 선생이 한 여자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교단에 서서 자기 소개를 하는 그 아이가 내 가슴에 빛으로 박혔다. 하얀 피부와 조용한 목소리의 그 아이는 아무 데서나 엉덩이를 까고 오줌을 누는, 장난치는 남자아이를 끝내 추적해 반죽음을 만드는, 그 마을 여자아이들과 달랐다. 내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나라 전체가 병영이었던 시절이었고 반장이었던 나는 선생과 급우들 사이에서 얼마간의 권력을 가졌다. 나는 내 자리를 그 아이의 근처로 옮기는 일에 기꺼이 그 얼마간의 권력을 사용했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이야기만 해도 급우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되던 시절 초등학교 4학년의 사랑이란 눈이라도 마주치면 서로 수줍게 미소짓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그리고 아주 가끔씩 해질 무렵의 들녘을 그 아이와 다섯 걸음쯤 떨어져 걸었다. 낭만적인 날들이 흘러갔다.

4학년 초 어느 날 밤 꿈을 꿨다. 멀리서 그 아이가 나를 향해 달려왔고 나는 그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아이가 내 손끝에 닿을 무렵 그 아이는 슬픈 눈이 되어 갑자기 돌아섰다.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그 아이를 좇으려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아이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잠에선 깬 나는 알 수 없는 불길함에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아침 밥상 앞에서 연신 헛기침을 해대던 아버지가 몹시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항아, 오늘 대전으로 이사간다. 선생님께 인사하고 오너라."

그 아이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담임 선생과 급우들에게 건성으로 작별 인사를 하고 한참을 교문 앞에서 서 있었다.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짐칸에 얹은 독 안에 숨고 나와 동생과 어머니를 운전사 옆에 태운 트럭은 대구를 빠져나와 비오는 경부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찢어진다는 말을 아는가. 와이퍼에 밀려나는 빗물만 쳐다보는 나를 어머니가 흘끔거리며 염려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처음 내 앞에 나타났을 때 그랬듯 나는 교단에 서서 내 소개를 했고 그 아이가 없는 날이 시작되었다. "머나먼 타국에 계신 것도 아니지만 당신과 나 사이가 너무도 멀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미조의 노래는 열한 살 짜리 소년의 가슴을 수시로 찢었다. 누구에게도 여자아이가 보고 싶다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고 나는 5학년이 끝날 무렵까지 거의 밥을 먹지 않았다. 나에게 시간이 흐른다는 건 그 아이를 생각하며 아득해지는 순간이 백번에서 아흔아홉번으로 아흔아홉번이 아흔여덟번으로 그렇게 줄어드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해 두해 시간이 흘러갔다.

고등학교 3학년 어느 날, 비로소 그 아이의 주소를 알아낸 나는 십여 년의 세월을 열 장의 편지에 담았다. "혹시 나를 기억하는지..." 열흘쯤 지난 어느 날 오후 우편함에 그 아이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며칠을 앓고 학교에 가보니 네가 없었어..." 스무 장에 가까운 그 아이의 편지를 가슴에 대고 나는 처음 눈물을 흘렸다. 다음 해 봄 어느 날, 불현듯 그 아이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대구행 기차에 올랐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내 얘기를 전해 들었다며 내 손을 꼭 쥐었다.

그 아이는 이틀 전 신입생 엠티에 갔고 오후 다섯 시쯤 돌아온다 했다.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그 아이의 어머니가 건네 준 사진첩을 펼쳤다. 낯모르는 아름다운 처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나는 그 처녀가 내가 그토록 아프게 추억해온 그 아이가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조금씩 두려움에 휩싸여갔다. 그 아이가 돌아올 다섯 시를 기다리던 나는 어느새 다섯 시까지 그 아이가 돌아오지 않길 빌고 있었다. 괘종시계가 다섯 시를 알리는 순간 나는 그 아이의 집을 빠져 나와 기차에 올랐다. | 씨네21 2000년_10월
2000/10/27 17:23 2000/10/2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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