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03/17 16:01
한국의 지식인들이 록에 열중하고 있다. 노래라곤 <광야에서>나 <아침이슬> 밖에 안 부르던 사람들이 록을 듣는다. 한국의 지식인들을 대변한다는 한겨레신문사는 '신중현 헌정공연'을 주최했다.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록은 지적이고 저항적인 음악으로, 쓸 만한 예술양식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90년대 들어 게임이 끝났음을 감지한 80년대의 문예활동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변신을 서둘렀다. 조직활동을 내세우던 사람들답게 청산 속도도 빨랐다. 문화예술 활동가들 가운데 순진한 몇몇은 절망감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기도 했으나 인생을 경영할 줄 아는 이들은 자신들이 버린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적당히 차용하는 대중예술 평론가로 명함을 바꿨다. 강철 같은 '사회주의 문예활동가'가 시침 뚝 떼고 '의식 있는 대중예술 평론가'로 변신하는 모습은 분명 보기 민망한 일이었지만 피차 살아보겠다고 작정을 하고 한 일이니 만큼 서로 지난 일을 언급하는 일은 금했다.


대중음악 부분은 틈새시장이었다. 김현식이 죽자 상황판단이 빠른 이가 재빨리 대중음악 평론이라는 아이디어 상품을 내놓았고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각광을 받는 분위기와 맞물리며 히트상품이 되었다. 80년대 운동권 노래를 계속 부르기도 썰렁하고 무식하게 대중가요를 무작정 따라 부르기도 난처한 지식인들에게 대중음악 가수나 곡에 대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해주는 평론과 연구들은 위안을 주었다.

언더그라운드 대중음악이라는 소재가 재탕 삼탕 되다가 대중음악계를 무협지로 묘사하는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록으로 옮겨갔다. 처음엔 '이승철과 다섯 손가락'하는 식의 실수가 빈번했지만 역시 고도의 지적 기능 훈련을 받은 사람들답게 금새 '문제는 록정신이다'라는 구호로 발전되었다(10여 년 전엔 '문제는 리얼리즘이다'였지 아마). 록의 불량함과 저항성은 사회적인 것으로만 해석되었고, 거기에 힘입어 텔레비전 카메라에 침을 뱉는 밴드가 나오고 음악은 엉망이지만 밴드의 존재 이유는 멋지게 설명하는 희한한 지식인용 밴드가 양산되었다.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70년대엔 탈춤과 마당극을, 80년대엔 소비에트나 북조선의 집체극을 진보적인 예술양식으로 선택했던 지식인들은 이번엔 록을 고르게 된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일은 지식인들의 끊임없는 변화에도 대중들은 한치의 동요나 불만이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지식인들은 대중성의 문제를 고려해 왔고 대중을 선도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심지어는 대중성에 대한 의견 차이로 조직이 깨지는 것도 불사했건만 슬프게도 뒤에 따라오는 대중은 단 한 명도 없었던 모양이다.

알고 보니 대중예술 평론이란 실제 대중예술이나 대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지식인이 쓰고 역시 지식인들이 읽기 위해 만들어 낸 대중예술의 해석판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역사책'이었던 것이다.

논리적인 근거나 타당성 없이는 행동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익숙하지 않은 대중예술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평론과 연구라는 고유의 해석판이 필요할 것이다. 또 한때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이니 만큼 끊임없이 '대중'을 이야기하고 연구하는 행위가 마음의 편안함을 준다는 것도 인간적으로 이해 안가는 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로 대중을 선도하거나 아주 조금이라도 연관되어 있다는 기대는 버려라. 어차피 다시 혁명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 씨네21 1998년_3월
1998/03/17 16:01 1998/03/17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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