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18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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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을 먹고 김단과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누가 벨을 눌렀다. ‘건이 어머니’를 만나러 왔다길래 누구냐 물으니 며칠 전에 건이 하고 사고 난 택배트럭 기사의 부인이란다. 아내도 없고 해서 대신 나가보니 아주머니는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연신 머리를 조아린다. 나는 정색을 하며 건이 상처가 넘어져 다친 정도일 뿐이고, 설사 좀 더 다쳤다 해도 부인의 남편에겐 전혀 잘못이 없으니 이러면 안 된다고 거듭 말했지만 아주머니는 그래도 머리를 조아린다. “이거 건이 먹으라고...” 큼지막한 상자를 건네주는데 포도와 삼겹살이다. 받을 이유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도로 들려 보내는 것도 강퍅한 일이라 “좋은 마음으로 알겠습니다.” 하며 가지고 들어왔다.

며칠 전 사고란 김건이 킥보드를 타고 가다가 택배 트럭과 부딪힌 일이다. 김건이 서 있는 트럭을 미처 못 보고 달리다 부딪힌 것인데, 시동을 막 건 순간이라 김건이나 택배트럭 기사나 꽤나 놀랐던 모양이다. 택배트럭 기사에겐 걱정 말라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그날 저녁부터 “과일이라도 들고 찾아오겠다”고 계속 전화를 했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 한사코 거절해 왔는데 오늘은 아예 그의 부인이 연락도 없이 찾아와 꼼짝없이 선물까지 받아 챙기게 된 것이다.

삼겹살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포도는 씻어서 아이들에게 내주었다. 천연덕스럽게 포도를 먹느 김건이 마땅치 않아서 한마디 했다. “김건, 너 때문에 아무 잘못도 없는 아저씨하고 아줌마가 놀라고 걱정하고 그러시잖아. 포도가 넘어 가냐?” “죄송해요.” 이럴 땐 꼭 존댓말이다. 물론 포도는 아무런 문제없이 입으로 들어간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맛있는 건 맛있는 거니 아이인 게지, 하고 더는 말을 안 하기로 한다.

그렇게 말렸는데도 기어코 찾아오다니... 참으로 마음씨가 고운 사람들이구나 싶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오죽 했으면 아무런 잘못도 없으면서 그렇게까지 마음을 썼을까 싶어서다.

요즘 이 나라 사람들을 보면 나쁜 사회가 사람들을 나쁘게 만든다는 사실을 집단적으로 증명하는 듯하다. 제 이해가 걸린 일이라면 모조리 눈알이 뒤집어져서 악귀처럼 덤벼든다. 위아래도 없고 좌우도 없다. 그러니 제 차에 남의 아이가 부딪혔다면 얼마나 큰일일 수밖에 없는가? 나쁜 사회가 사람들을 나쁘게 만들고 나빠진 사람들은 다시 사회를 더 나쁘게 만든다. 이 나라는 이렇게 망해가는 걸까...
2004/10/18 09:32 2004/10/18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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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이글을 보고 눈물이 나는 이유는 뭘까?

    Tracked from J's bar....Be happy 2004/10/20 14:24  삭제

    일요일. 저녁을 먹고 김단과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누가 벨을 눌렀다. ‘건이 어머니’를 만나러 왔다고 해서 누구냐 물으니 며칠 전에 건이 하고 사고 난 택배트럭 기사의 부인이란다. 아내도

  2. Subject: 인간이 되는 법

    Tracked from 여름소년 2004/10/29 03:07  삭제

    <a href=\"http://gyuhang.net/archives/2004/10/18@09:32AM.html\" target=\"_blank\" rel="nofollow"><b>포도와 삼겹살</b></a> 인간되려면 한참 먼 놈이지만... 이글을 읽으며 생각해본다. 난 착한가? 아닌가? 이 세상의 넘치

  3. Subject: bing.com

    Tracked from bing.com 2014/09/25 20:18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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