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24 12:33
서양 중세에 이르기까지 사적 소유 개념은 없었다. 토지는 신의 것, 즉 어떤 인간의 것도 아니었다. 왕과 귀족은 영토가 있었지만 소유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농노는 안식일을 뺀 6일 가운데 절반은 영주의 땅에서 절반은 제 땅에서 노동했다. 영주의 땅, 제 땅은 실제 경계선이 아니라 비율로서만 존재했다. 사적 소유가 아니라 집단적 소유였다는 말이다. 어림잡아 전체 토지의 3분의 1 가량은 공유지로 존재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곳에서 먹을 것을 구하고 짐승을 방목하고 퇴비도 만들었다.

15세기 들어 공유지에 울타리를 치고 양목장을 만드는 지주가 출현한다. 토마스 모어가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라고 표현한 인클로저 운동이다. 살 길을 잃은 사람들은 유랑민이 되고 16~18세기 신흥 부르주아지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절대왕정의 폭력적 정책에 따라 도시의 프롤레타리아를 형성해간다.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적 소유 개념은 자본주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약탈과 폭력, 착취와 함께 창조된 것이다. 사적 소유 개념은 로크 등에 의해 자유주의 이념과 쌍을 이루며 근대적 민주주의의 기초가 된다.

생시몽 오언 푸리에 같은 이상주의적 맥락이든 맑스의 과학적 맥락이든 사회주의 운동이 사적 소유의 철폐를 핵심 내용으로 한 건 당연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시작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맑스의 견해를 따라’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모든 걸 국유화한다. 그러나 맑스는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 맑스가 생각한 사회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함께 ‘사적 소유’(약탈과 착취에 기반한)는 없애되, 각자의 노동과 노력에 따른 ‘개인적 소유’는 인정하는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는 결국 전제적 지배계급의 사적 소유 체제로 귀결하고 당연히 인민에 의해 붕괴된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역설적이게도 소유에 관한 자본주의적 관점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게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현정부의 토지 공개념 운운은 좋은 이야기지만 예의 입에 발린 말(그들은 미국 리버럴의 ‘정치적 올바름’을 답습하고 있고, 성공적인 여론을 얻고 있으며 그에 고무되어 있다)에 그칠 운명을 갖는다. 단지 그들 자신이 지대소득자들이라거나 위선자들이라서가 아니라, 앞서 말했듯 자유주의와 사적 소유, 특히 토지의 사적 소유는 애초부터 한몸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어떤 형태로든 토지만 사적 소유의 틀예서 예외로 두는 일 같은 건 가능하지 않다.

새로운 사회의 구상은 소유의 자유주의적 관점을 벗어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즉 토지를 비롯하여 어떤 인간도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을 분명히 하고, 사적 소유와 개인적 소유를 구분하고 교정해가는 혁명적 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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