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08/10 16:41
지난번 '광수 생각'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내가 <씨네21>을 공격한 일을 두고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먼저 내가 <씨네21> 편집장과 격의 없는 사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은 둘이 싸웠냐고 묻는다. 그 얘긴 싸워서 그걸 쓰게 되었냐는 뜻과 그걸 쓰고 싸우지 않았느냐는 뜻을 모두 담고 있다. 반면에 나와 개인적인 친분이 없는, 이를테면 강연에 온 청중이거나 이메일을 보내오는 독자들은 음모론에 가깝다. 그들은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 <씨네21>이라는 잡지의 격조를 드러내려고 둘이 짠 것 아니냐는 식으로 묻곤 한다.

아쉽게도 두 가지 추정은 진실과 멀다. 설명 대신 그 <씨네21>이 나온 직후 나와 <씨네21> 편집장 사이의 전화 통화 내용을 옮겨 본다. "조 선배, 김규항입니다."(그는 나보다 두 살 많다.) "아니, 이 배은망덕한 필자가 자기를 키워준 잡지를 씹어."(그는 늘 자기가 나를 필자로서 '머리 얹어주었다'고 유세하곤 한다.) "하하하, 나는 살모사 새낍니다." "김규항씨가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분명한 우리 입장이 있어." "아이구, 그만둡시다. 그런데 왜 전화 안 했어요."(그는 이따금씩 원고를 받고 전화를 하는데 그런 음험한 거래를 통해 내가 포기한 문장으로 '존만 새끼들', '잠지를 까고' 등이 있다.) "아 우리가 그 정도 격조는 있지." "격조가 아니라 개인적인 자존심 아닙니까. 속은 부글부글 끓지만 후배들 앞에서 그걸 드러내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하하하, 하여튼 앞으로 매번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는 자르는 방법밖에 없어." "얼마든지. 하여튼 사적으론 백배사죄 드립니다."

나와 <씨네21>이 연루된 음모론의 한 예를 꺼낸 건 내가 보기에 오늘의 한국인들이 대개 음모론자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보통 사람들(동네 아줌마들, 복덕방 아저씨들, 포장마차의 취객들 등)은 '서해교전'이고 '신창원 체포'고 다 짜고 하는 짓이라는 의견을 큰소리로 서슴없이 내놓는다. 사실 여부를 떠나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다. 적은 수의 청년들만이 국가를 의심하던 음모론자이던 시절 보통의 한국인들은 청년들에게 말하곤 했다. “너희가 세상을 몰라서 그래.” 그러나 그 청년들이 음모론을 절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오늘, 보통의 한국인들은 너나없이 음모론자다. 한국인들의 시민의식이 하루아침에 비약한 걸까.

알다시피 음모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진실을 밝히려는, 세상은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에 봉사하는 음모론이다. 다른 하나는 세상을 불신하는, 세상은 절대 개선되지 않는다는 냉소에 봉사하는 음모론이다. 오늘 한국인들은 대개 후자에 해당한다. 그런 음모론에 빠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세상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세상에 적응하는 일뿐이다. 그들은 그들이 체득한 적응의 노하우를 자식에게 가르쳐 대를 잇는다.

'군부독재정권의 억압에 신음하던 국민들', 혹은'일천이백만 노동자'라는 말은 지식인들의 레토릭일 뿐이다. 생각해 보라. 한국인들이 그런 일에 신음할 만큼 근대적인 시민의식을 가질 기회가 있었던가. 한국 노동자들이 일천이백만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노동자라는 근대적인 계급의식을 가질 기회가 있었던가. 한국인들은 봉건사회에서 바로 식민통치, 그리고 극우 파시스트 치하에서 3대 이상을 살아왔다. 그런 한국인들이 파업하는 지하철 노동자와 자신들이 같은 노동자라는 걸 깨닫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노동자인 그들은 우습게도 '노동자 새끼들 땜에 내가 못 살겠다'고 분노하곤 한다.

더욱 희한한 일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한국에서 이른바 '정신 세계를 창조하고 배분하고 적용'한다는 지식인들만은 적잖이 탈근대적(포스트 모던)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근대도 이루지 못한 나라에서 탈근대를 외치는 코미디언들이다. 그들과 관련하여 나는 얼마 전부터 작은 고민에 빠져 있다. 노숙자들을 일컬어 '한국의 하층민들이 드디어 국가를 거부하기 시작했다'고 찬미한 어느 포스트모더니스트를 한번 불러내서 패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나는 눈을 감고 이렇게 되내인다. "사람을 패는 일은 근대적이지 않다." | 씨네21 1999년_8월
1999/08/10 16:41 1999/08/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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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스크랩]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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