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02 15:14
친구 노태맹이 새 시집 <벽암록을 읽다>를 보내왔다. 두 손으로 시집을 쥐고 처음 펼쳐진 90쪽과 91쪽에 실린 시를 읽는다. 문득 그의 시는 사상의 물길 위에 지어진 음률의 건축이라는 생각을 했다.

*

<흰 나비 도로를 가로지르고>

지하 주차장에 가득 찬
비발디의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에
차 문을 열다 잠시 감전된 듯 멈추다.

성서 공단을 지나고 하수처리장을 돌아,
작은 메타세쿼이아 숲가에 차를 세우고
부정맥으로 일렁거리는 내 안의 강물들을 진정시켜보다.

꽃 핀 자귀나무 위 공기들이
붉은 부채꼴 모양으로 둥글게 말렸다 닫히고
새떼들의 울음을 덮는 환한 나무그늘.

혹은 천천히 도로를 가로지르는 희 나비 한 마리...

하지만 우리 생은 이런 아름다운 내러티브가 아니지.
지나온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붉은 구름들이 도로를 따라 가고

이 길 위에서의 내 전망이란
길바닥 붉은 살덩이가 눌러붙어 있는 계급론
나비 한 마리를 허공으로 날려버리는 공황론 같은 것.

술이 다 깰 때까지 참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고
그럼에도 생이란 내 차가 지나간 그 길 위
다시 천,천히, 도로를 가로지르는
한 마리 흰 나비 같은 것일 것인가, 어쩔 것인가.
2016/06/02 15:14 2016/06/02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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