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22 23:56

몇 해 전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노페 열풍’(노스페이스 패딩 열풍)이 있었다. 그즈음 노스페이스 창업주가 한국에서 실적이 좋은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한국엔 산이 많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 산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는 제 상품이 한국 고등학생의 ‘비공식 교복’이라는 사실은 몰랐던 것 같다. 고등학생들은 왜 그리 노페에 집착하고 또 안달했을까? 이런저런 사회문화적 분석을 할 수 있겠지만, 결국 옷에 관한 ‘취향’이 없기 때문이다.

교사들에 따르면 MP3 플레이어(최근엔 스마트폰으로 통합된)에 기획사에서 만들어내는 유행 음악이 아닌 음악, 대중음악의 고전이나 인디음악 파일이 한 개라도 있는 아이는 반에서 하나가 채 안된다고 한다. 왜 그런 걸까? 역시 아이들에게 음악에 관한 ‘취향’이 없기 때문이다. 취향이 없는 아이는 유행하는 것, 즉 남들이 하는 걸 따르게 되고, 따를 수 없을 때 심한 통증을 느낀다.

노페 열풍도 강남에선 통하지 않았단다. 어릴 적부터 노페보다 더 좋은 옷들을 구매해본 아이들에게 노페 열풍이란 촌스러운 풍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취향이라기보다는 소비 취향이다. 브랜드와 가격으로 표현되는 소비 취향은, 취향처럼 보이는 자본에 의한 ‘취향의 계열화’다. 그러나 주류 대중음악이 아닌 음악을 듣는 아이들이 가장 많은 곳 역시 강남이라는 사실은, 소비 취향의 기회와 취향 사이의 일정한 인과관계를 보여준다. 물론 대개의 아이들은 강남 아이들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취향이 없는 이유는 역시 어른들(부모들)에게 취향이 없기 때문이다. 옷이나 음악뿐 아니라 삶의 여러 부문에서 나름의 취향을 가진 사람, 남의 기준이나 이목에 아랑곳않는 제 나름의 미감과 생활철학을 가진 사람을 찾기란 정말 어렵다. 이를테면 돈에 대한 나름의 주관이나 철학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단지 다들 ‘돈이 모자란다’고 생각할 뿐이다. 집이라는 게 삶에서 무엇이고 나에게 적당한 집은 어떤 것이며 집을 위해 인생을 얼마나 할애할 것인가 등에 대해 나름의 정리된 생각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내 집이 작은가 큰가, 싼 집인가 비싼 집인가를 생각할 뿐이다.

이런 상태는 결코 자연스러운 것도 당연한 것도 아니다. 훨씬 더 가난했고 생존이 숙제이던 시절의 사람들도 나름의 취향과 철학을 가졌다는 사실을 떠올려볼 때 말이다. “돈이 중요하지. 하지만 사람이 너무 탐욕 부리면 죄 받지.” 이 흔하디흔한 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적 위엄을 지키는 삶의 비결을 묘파한다. “공부 열심히 해. 하지만 공부가 인생의 다는 아니야. 동무한테 양보할 줄 알고 잘 놀아야지.” 어지간한 어른이라면 예사롭게 하던 이 말엔 교육 철학의 정수가 담겨 있다.

돈, 집, 직업, 아이 교육, 종교, 사랑 등 삶의 부문들에서 마련된 취향과 삶의 철학들이 모여 하나의 ‘생활양식’을 만들어낸다. 생활양식은 한 인간의 영적 성곽이다. 노페 점퍼를 두 벌 가진 아이가 못 가진 아이를 무시할 순 있지만 옷에 대한 나름의 취향을 가진 아이에겐 별 도리가 없다. 마당이 온통 잡초로 덮인 작고 초라한 시골집에서 혼자 살아가는 병든 노인을 누군들 측은히 여기지 않을까. 그러나 제 생활양식에 의거하여 바로 그렇게 살던 권정생을 측은히 여긴 사람은 없었다.

신자유주의에서 삶이란 곧 생활양식이 파괴된 삶이다. 신자유주의는 단지 ‘보이지 않는 손’에 모든 걸 내맡기는 19세기 경제체제의 부활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극단적 개인주의와 물신주의로 개조하려는 강력한 영성운동이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인간이 낱낱이 흩어져 무한 경쟁을 벌임으로써 구원을 얻는, 또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으로 가득한 세상을 유토피아라고 설파하는 종교다. 한국인들은 1997년 이래 그 종교에 포획되었다. 이명박이라는 극단적 추(醜)와 박근혜라는 극단적 악(惡)에 분노하는 ‘정의로운 사람들’의 일상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생활양식은 24시간 내 영혼을 파고드는, 불안감과 경쟁 강박에 전전긍긍하게 하는 종교에 대한 면역체계다. 물론 신자유주의하에서 나름의 생활양식을 온전하게 마련하긴 어렵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내가 지금 당장 마련할 수 있는 생활양식의 범주는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이다. 신자유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쓰고 있기에 그 자체로는 내 삶을 말단까지 장악하기 어렵다. 내가 나름의 생활양식을 가지려 하지 않음으로써 말단까지 장악되는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역이용하여 나만의 생활양식을 만들어갈 수 있다.

아이에게 제 삶과 관련한 취향들을 일찌감치 하나씩 길러주고 돈, 집, 직업, 교육 등 삶의 모든 부문에서 차근차근 나만의 생활양식을 만들어가는 일, 누구도 감히 내 삶의 가치를 함부로 평가하거나 재단할 수 없는 영혼의 성곽을 쌓아가는 일은 일상에서 수행하는 신자유주의와의 전투다. 물론 일상의 전투만으로 신자유주의가 극복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전투가 없다면 사회적 차원, 좀 더 거대한 차원에서 전투도 없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체제이자 종교이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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