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05/19 16:33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하자 아버지가 분주해졌다. 하루는 아버지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거 OO본부 행정병으로 가는 건데, 그런 데 가면 책도 볼 수 있고 좋지 않으냐.” 직업군인이던 아버지는 당신 아들 됨됨이와 당신이 삼십 년 동안 체험한 군대가 빚어낼 부조화에 대해 오래 전부터 심각하게 걱정해온 터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모병 쪽에 있던 아버지 동기가 약간의 배려를 한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청을 물리칠 수 없었고 그날 밤 종이를 채우기로 했다. 김-규-항-6-2-1-1-2... 워낙에 악필이라 글자 하나에 1분 정도를 들여 ‘그려나가던’ 나는 이내 짜증에 휩싸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나 때문에 원래 그 부대 운이 닿았던 한 녀석이 전방에 가서 뺑이 칠 거라는 데 생각이 이르자 도저히 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종이를 찢어 휴지통에 던졌다. “아버지 저 그냥 갈게요. 꼭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아버지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떨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대 당일 나는 가족들을 대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친구 녀석들에게 입대 날짜를 알리지 않은 건 물론이었다. 혼자 기차를 타고 논산에 내려 머리를 깎고 훈련소에 들어섰다. 의연하고 의젓하게, 하여튼 갖은 폼은 다 잡으며 입대했건만 내 선택을 후회하게 되는 데는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67년 생부터 거슬러 시작한 나이 파악은 65년생에서 제일 많았고 63년생 땐 아무도 없었다. 파악을 마쳤다고 생각한 조교는 내무반을 나갔다. 조교가 다시 돌아온 것은 5분이 채 못 되어서였다. 다짜고짜 짠밥통을 걷어찬 조교가 소리쳤다. “손 안 든 새끼 나와.” 더럭 겁이 난 나는 앞으로 튀어나갔다. “너 이 새끼 왜 손 안 들었어.” “62년생입니다.” 와 하고 폭소가 터졌다. 머쓱해진 조교는 나가버렸지만 그 요란한 웃음소리는 내 머리통 속에 아득한 공명을 일으키며 후회와 절망감으로 변해갔다.

그 광경을 본 건 상병 때였다. 휴가 길에 나는 화곡동 국군통합병원에 들렀다. 중대 이병 하나가 트럭 바퀴에 머리통이 끼는 사고를 당해 입원해 있었다. 귤봉지를 들고 정형외과 병동을 찾았을 때, 내가 찾은 녀석 건너편 침상에 유난히 체구가 큰 사병 하나가 눈을 감은 채 울고 있었다. 침상 옆엔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아들 손에 고개를 묻은 채 하염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사병의 몸엔 담요가 덮여 있었지만 나는 이내 그의 다리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모자의 끝 모를 절망과 비통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군대 가서 사람된다느니 사내다워진다느니 하는 얘기는 그저 농담이다. 사람이 되는 게 권위에 무작정 복종하는 일이고 사내다워지는 게 힘없는 사람에게 일수록 불량스러워지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군대도 군대 나름이겠지만 이 나라의 평범한 아들들이 가는 군대란 언제나 고되고 삭막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며 아차 하면 장애인 되거나 죽는 곳이며 도무지 배울 게 없는 곳이다. 돈을 먹여서 군대를 빠지는 일이 끔찍한 죄인 건 단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 하지 않거나 남 하는 고생을 피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대신 군대에 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마님 아들 빠진 자리를 머슴 아들이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이른바 시민사회에서 말이다. 군대란 안 갈수록 이익인 곳임에 분명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한국의 신체 건강한 청년이라면 그저 눈 딱 감고 3년 썩어줄 필요가 있다. 어쩔 것인가. 후진 나라에 태어난 것도 죄라면 죄 아닌가.

제 자식 대신 남의 자식 군대 보내는 더러운 아버지들, 그리고 이제 스물 몇 살의 나이에 그런 악취 나는 거래에 제 몸을 내 맞긴 음탕한 아들들. 그들에게 성질 나쁜 아들 군대 보내고 3년을 잠 못 이룬 내 아버지의 한숨과 다리 잘린 아들 곁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울던 한 어머니의 눈물을 담아 꼭 들려줄 말이 있다. 개새끼들. | 씨네21 1999년_5월
1999/05/19 16:33 1999/05/1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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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개새끼들

    Tracked from Beat in datail 2004/06/21 23:58  삭제

    나도 좀 개새끼가 아닐까?? 힘없고 돈없는 놈들 뺑이치는데, 졸라 땡보지... 물론 빽써서 들어온건 아니다. 시험봐서 뽑혔지.수능이랑 비스무리 한거..그리고 면접. 아무 대학 간판이 영향이 컸?

  2. Subject: 나도 개새끼

    Tracked from Beat in datail 2004/06/22 00:11  삭제

    나도 개새끼일 수도 있을듯... 힘없고 돈없는 놈들 뺑이치는데, 걔들에 비하면 졸라 땡보지... 물론 빽써서 들어온건 아니다. 시험봐서 뽑혔지.수능이랑 비스무리 한거..그리고 면접. 면접땐 아?

  3. Subject: 국익?

    Tracked from 學習과 思索 2004/07/03 15:18  삭제

    사진출처 http://gyuhang.net/ 도대체 국익의 실체는 뭔가? 김선일씨도, 광화문에서 촛불을 든 사람들도, 그리고 나도 빌어먹을 이 나라의 국민이다. 하지만 우리의 이익과 이해는 국익에 포함되지

  4. Subject: "개새끼들 - 1999.05.19 김규항

    Tracked from "누구의 것도 아닌 집 - 조용한 방 2004/09/22 17:33  삭제

      나는 입이 없다. 입이 있다 해도 그것을 통해 한 숨을 내쉴 가슴이 없다. 가슴이 있다해도 그것을 채울 울분이 없다. 그 울분 입으로 받아 먹었어야 하거늘, 사실 나는 입이 없다. 그래서 나

  5. Subject: 개새끼들

    Tracked from 내가사는 세상 우주코딱지 2004/09/22 18:10  삭제

    개새끼들 뭐 역시 군대는 갈 곳이 못 된다. 하지만 어쨌든 대한민국 -평범한 가정의- 남자가 저뒤의 '사회'라는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통과할 수 밖에 없는 문이기에 들어?

  6. Subject: 멀게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

    Tracked from Fragments of Memories 2004/10/19 23:24  삭제

    의문사를 당했습니다. (by 케인님) 군대라는 조직은 어쩔 수 없다. (by GONS님) 개새끼들 (by 김규향님) 우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따지고 보면 한다리 건너서 아는 분에게 닥친 일이기도 하고, ?

  7. Subject: 개새끼들

    Tracked from 아이원츄♡ 2005/05/25 18:10  삭제

    맞는 말이다. 현실과의 갭이 느껴지는 것이 안타깝다. 이 상황과 안맞는 깨는 코멘트 하나 하자면 '맞긴'이 아니라 '맡긴' ^.^(...)

  8. Subject: 개새끼들

    Tracked from rpmzero 2006/01/02 02:32  삭제

    개새끼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하자 아버지가 분주해졌다. 하루는 아버지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거 OO본부 행정병으로 가는 건데, 그런 데 가면 책도 볼 수 있고

  9. Subject: 援곕?

    Tracked from 2007, Sincerely. 紐④퉫遺?org 2007/03/15 22:00  삭제

    ?€?숈뿉 ?ㅼ뼱?€??留롮씠 蹂€?섍린???덇퀬, ???꾪? 蹂€?섏? ?딄?..

  10. Subject: amator의 생각

    Tracked from amator's me2day 2011/08/08 21:47  삭제

    개새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