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08/25 16:16
김단. 먹고 자는 시간을 뺀 하루의 대부분을 그리기와 종이접기 따위로 보내는 내 딸이다. 김단이 태어나자 아내와 난 김단에게 결혼을 권유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갓난아일 두고 좀 싱거운 짓이었고 얼마간 관념적이었지만 여자가 자존을 지키며 살기 힘든 세상에 또 하나의 여자를 내놓은 장본인들은 긴장했고 그렇게라도 미래를 대비하고 싶었다. 김단은 사랑니 빼러 치과에 가본 일 말곤 병원 근처에도 가본 일이 없는 아비와는 달리 세 살이 되기 전에 입원을 두 번씩이나 해서 애를 끓였다. 그후론 별 탈 없이 자랐고 언젠가 샤갈 화집을 사준 이후 커서 '화가아저씨'가 되겠다고 말하는 김단은 다섯 살이다.

다섯 살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밖에서 놀다 들어온 김단이 내방 문을 두드렸다. "아빠, 삼식이(가명)가 내 고추 만졌어." 나는 놀랐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랬어, 언제?" "응, 어제." 김단은 어제 이상의 과거는 전부 어제라고 말하지만 눈치로 볼 땐 이삼 일 전 일이다. "아빠한테 자세히 말해줄 수 있어?" "엄마한테 말하면 안 되는데..." "엄마한텐 말 안 할께. 약속. 그런데 아빠한테 말해야 아빠가 도와주지." 망설이던 김단은 말했다. "응, 삼식이가 내 고추 만지구 엄마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어." "아빠가 삼식이 혼내 줄께. 다시는 안 그럴 꺼야. 그런데 혹시 다른 오빠나 아저씨가 단이 몸 만지면 단이가 싫다고 말해야 해." "그래도 만지면?" "그땐 막 화내고 미운 말 해도 돼. 그리고 아빠한테 꼭 말해야 돼. 그런 오빠나 아저씨들은 다 겁쟁이들이니까 아빠가 혼내줄 수 있어. 약속할 수 있지?" "응."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로 도장까지 찍었지만 나는 엄마에게 비밀로 하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않았다. 아내는 다음 날 삼식이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이 일을 일러주었고 삼식이 엄마는 아들에게 성교육을 시작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일거리('영화언어 발행인'이라는 그럴싸한 직함과는 달리 최근 이삼년 동안은 남의 책을 만들어 주거나 몇 푼의 원고료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끼적거리는 부업에 전념하는 편이다.)를 주겠다는 후배와 마주 앉아 애를 쓰고 있는데 집에서 삐삐가 왔다. 바로 전화를 했더니 김단이 눈 밑이 퍼렇게 되어 들어 왔단다. 김단은 지 아비를 닮아 무척 고집이 센데 완력은 그 고집에 못 미치다 보니 남자아이들한테 얻어맞는 일이 잦았지만(예나 지금이나 애나 어른이나 남자에게 항거한 여자에게 돌아오는 건 주먹뿐이다.) 그래도 눈탱이가 퍼렇게 멍이 든 건 처음이었다. 아내는 이 잘난 가장에게 지침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우선 김단이 제딴엔 놀랐을 테니 잘 안정시키라고 아내에게 이른 다음, 놀라긴 매한가지로 보이는 아내에게 때린 놈 엄마한테 전화를 한다거나 하는 일은 삼가라고 말했다. 그날 저녁 나는 아내에게 아들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는 걸 보고도 그냥 지나가던 김단의 할머니 얘길 해주었다.

제법 가장 노릇을 해내고도 나는 담배연기를 뿜기 시작했다. 드디어 상황은 시작된 것이다. 이제 김단은 나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떨어져 지내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 일어난 일보다 훨씬 심각한 일들이 일어날 가망성도 점점 커질 것이다. 하지만 김단은 점점 더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을 얘기해주지 않게 될 것이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도 점점 작아질 것이다. 결국 김단은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김단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강한 여자로 키워야 한다. 최악의 상황을 만나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울면 안 된다. 우는 여자가 남자를 이길 방법은 없다. 어떤 경우에도 울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육체적인 힘도 중요하다. 태권도나 검도를 삼 년쯤 배우면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맞진 않을 것이다. 킥복싱도 좋은데... 온갖 생각을 하며 담배 연기를 뿜던 나는 재미있는 상상에 접어들어 빙그레 웃었다. 15 년쯤 지나(그보다 훨씬 빠를 수도) 김단이 제 남자 친구와 처음으로 여행을 가는 날, 나에게 어떤 거짓말을 할까. 나는 과연 김단에게 속을 것인가, 아니면 속는 체 할 것인가. 아마 김단은 나를 속일 수 있을 것이다. 강한 여자는 남자를 속일 수 있다. | 씨네21 1998년_8월
1998/08/25 16:16 1998/08/25 16:16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14

  1. Subject: chevy cruze tail lights

    Tracked from chevy cruze tail lights 2014/06/11 02:34  삭제

    GYUHANG.NET ::

  2. Subject: female libido enhancer

    Tracked from female libido enhancer 2014/06/11 08:00  삭제

    GYUHANG.NET ::

  3. Subject: weck jar

    Tracked from weck jar 2014/06/13 00:57  삭제

    GYUHANG.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