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2/09 20:11
출근길에 한강을 바라보다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예수전'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청년들을 위한 예수전은 전부터 생각했지만 아이들을 위한 건 처음이다. 왜 진작에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이들이 읽을 수 있다는 건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인데.. 예수는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게 써야 한다.

아이들이 읽는 예수전이라 해도 '예수의 껍데기'는 벗겨내야 한다. 아니, 아이들이 읽기에 더더욱 그래야 한다. 모든 어른과 모든 교회가 아이들에게 예수의 껍데기를 가르친다. 아이들은 일생 동안 예수를 ‘머리 뒤에 광채를 두른 채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듯 말하는 섬약하게 생긴 백인 남성’으로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단지 그를 ‘믿으면’ 현세와 내세가 보장되는 되는 것으로 안다. 그게 한국인들과 예수의 거의 유일한 조우다.

예수전은 처음부터 차근차근 되짚는 게 좋겠다.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예수의 신령함이나 순정함을 주장하는 전근대적인 상상력이다. 그걸 생물학적으로 반박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 이야기는 생물학을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므로. 가령 그 이야기는 이렇게 보충된다.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낳든 창녀에게서 낳든 다를 게 없어. 사람의 가치가 엄마가 누구냐 아빠가 누구냐에 따라 정해지는 건 아니야."

오늘부터 구상에 들어가자. 가만, 그림을 누구에게 맡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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