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8/24 23:57
지난해 가을, 9.11 사건과 관련한 어떤 이의 발언을 격렬하게 비판한 며칠 후, 이오덕 선생이 내 글을 읽었다며 전화 메모를 남겼다. 화가 나신 건가 싶었지만, 설사 야단을 맞더라도 이분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지 싶어(그는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의 아이들과 한국의 말을 위해 가장 비타협적으로 싸워온 전사다.) 다음 날 일찌감치 전화를 드렸다. 그는 내 글을 잘 읽었다며 말했다. "사람이 몸을 움직여 일도 하고 해야 바른 정신을 가질 수 있는데, 늘 앉아 책만 읽고 생각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지 싶습니다." 그는 그 일의 본질을 검소한 한마디로 꿰뚫었다. 나는 안도했다. 그가 나를 야단치지 않아서, 논란에 빠진 내 글을 옹호해서가 아니라, 그의 정신이 건재함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존경할 만한 정신들은 대개 90년대를 통과하면서 '아무것도 분명히 판단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총체성을 늘어놓는' 걸레가 되었다. 나는 그도 그렇게 되었을까 내심 두려웠던 것이다.

겨울이 시작할 무렵 나는 그의 거처를 찾았다. 동그란 산들과 동그란 물들. 충북(의 풍경은 곧 한국의 풍경이다) 음성에서 충주로 넘어가는 길목, 산 구비를 비껴 돌로 지은 집에 그가 살았다. 그는 세 해 전 건강이 나빠져 아들이 살고 있는 이곳으로 내려왔다. 어림잡기 힘들 만치 많은 책들이 밀림을 이룬 그의 서재 한켠에 놓인 낡은 소파에 그와 마주앉았다. "제가 말도 잘 못하고 아이구, 인터뷰 그거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의 생각이 사람들에게,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좀더 친절하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말로 간신히 그를 설득하고, 녹음기를 켰다. 그가 내놓은 차를 마시며, 나는 서사시를 읽듯 천천히 그의 곧고 광활한 정신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머리와 글로 사는 적은 사람들이 몸과 말로 사는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는 세상을 반대한다. 말하자면 그의 생각은 매우 계급적이며 급진적이다.(그는 '계급'이나 '급진' 같은 개념어를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하긴, 계급이나 급진이라는 말은 계급과 급진을 표현하는 한 방법일 뿐이다.) 그가 아이들의 문제에 일생을 다 바친 이유 역시, 아이들의 바른 정신이 세상을 바르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모든 타협하지 않는 정신이 그렇듯 그는 늘상 오해에 휩싸여 산다. 그는 완고한 우리말 전용론자라 오해 받곤 한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젠 사용하지 않는 생경한 옛말들을 우리말이랍시고 사용하는 일은 오만한 엘리트주의라 여긴다. 그는 모든 우리말에 완고한 게 아니라,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정신이 담긴 우리말에 완고하다.

오랫동안 담아두었던 질문을 했다. "선생이 말하는 말의 혁명은 결국 정치 혁명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결국 그런 셈입니다." 조용히 미소 짓는 그의 주름진 얼굴 왼편으로 충북의 동그란 햇살이 들었다. 나는 그가 청년임을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늙는 게 숙명이라는 말은 거짓말이거나 절반만 맞다. 몸이 늙는 건 숙명이지만 정신이 늙는 건 (온갖 요사스런 핑계와 그럴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선택이다. 일흔의 몸에 스물의 정신을 가진 청년이 있고 스물의 몸에 일흔의 정신을 가진 노인이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제 선택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조금씩 하루도 빠짐없이 신념과 용기와 꿈이 있던 자리를 회의와 비굴과 협잡으로 채워갈 때, 그런 순수한 오염의 과정을 철이 들고 성숙해가는 과정이라 거대하게 담합할 때, 여전히 신념과 용기와 꿈을 좇으며 살아가는 청년들이 있다.

그 청년들 역시 계급적이며 급진적이다. 전북 변산의 윤구병 청년은 종일 논과 밭을 메며 가르치는 게 다인 듯한 변산공동체를 이끌지만, 9.11 사건을 초국적 금융독점자본에 대한 제3세계인민의 전쟁이라 해석하는 급진주의자다. 서울 혜화동의 서준식 청년은 억울한 사람의 호소를 들어주는 일에 전념하는 듯한 인권운동사랑방을 이끌지만, 인권을 모티브로 세상의 근본적인 변혁을 꿈꾸는 급진주의자다. 그 청년들이, 그 철없는 비타협의 정신들이, 청년의 몸에 노인의 정신을 가진 수많은 우리가 망가트린 세상을 복구하는 중이다.(씨네21 2002. 8.24)
2002/08/24 23:57 2002/08/24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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