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8/22 23:35
(17일 안동에서 열린 '어린이와 문학' 여름연수 토론문)

아동문학에 대한 식견이라곤 아이에게 동화책을 골라주는 정도인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아동문학 자체보다는 아동문학을 둘러싼 현실에 대해 말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삶이 현명함을 잃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주요한 것 하나는 우리가 사는 현실이 중립적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현실은 대개 어떤 쪽으로든 편향적이며 그걸 제대로 인식하지 않을 때 거꾸로 우리 삶이 편향에 빠지게 된다. 나름대로 열심히 진지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거대한 지배체제의 시스템에 놀아나는 ‘불쌍한 바보들’이 되는 것이다. 군사 파시즘이 폭력과 권위주의로 지배하는 시대엔 웅크리고 있어도 정신은 함락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자본의 시대엔 어느새 우리 영혼까지 파고든 자본의 가치관들이 우리를 스스로 굴종하게 한다. 그런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아이들에 관한 모든 활동이나 생산물들은 그 양식이나 외형과는 상관없이 독일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이른바 ‘민주화’를 시작한 지 20년이 되었다.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절차로 보는가 분배나 계층 같은 좀더 구조적인 차원으로 보는가에 따라 의견이 좀 다르긴 하지만, 적어도 개인의 자유가 몰라보게 진전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어디를 가든 무슨 말을 하든 함부로 제한받거나 구속받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사회엔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옛 군사독재 시절보다 오히려 더 퇴보한 사람들이 있다. 누구일까? 바로 아이들이다.
군사독재 시절에도 아이들에게만은 자유가 있었다. 마음껏 뛰어놀고 어른들의 강제가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우리는 그 느리고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아 보이는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정서와 인간적 면모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걸 안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을 보라. 그들은 감옥에서 지내는 수인들과 다를 바 없다. 평균적으로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이른바 교육열이 높은 지역에선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아이들은 경쟁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혀 지내게 된다.
과거식 어린이 탄압, 즉 폭력이나 권위주의적 방법을 통해 아이들의 자유와 인권을 구속하는 일은 이제 적어졌고 누구나 비판적이다. 이를테면 아이들을 심한 매로 다스리는 교사는 발붙이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이른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훨씬 더 강도 높은 구속이 이루어지는 오늘의 어린이 탄압은 전사회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 탄압은 이른바 ‘아이의 미래’라는 강력한 명분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 이후, 특히 IMF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무한경쟁 체제로 변화하면서 아이들이 경쟁의 감옥으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경쟁의 감옥에서 중요한 건 인간적 면모가 아니라 경쟁력이다. 아이들은 인간이 아니라 상품으로 길러지는 것이다. 옛날엔 아무리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부모라 하더라도 아이들에겐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너 하나만 잘났다고 되는 게 아니다.” “너보다 약하고 불쌍한 동무를 보살펴야 한다.” 그러나 이젠 진보적인 부모들도 아이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못한다. 가르친다고 해도 초등학교 고학년쯤이면 끝이다. 동무는 곧 경쟁자이며 경쟁자를 존중하라는 말은 패배하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치 온 세상이 다 그런 줄 알지만 세계 어디에도 아이들을 이렇게 키우는 사회는 없다. 군사 파시즘에서 빠져나와 민주화의 기쁨에 취한 우리는 급격한 자본화의 바람에 별다른 경계가 없었다. 불과 일이십년 사이에 한국인들을 돈과 외형적인 가치에 미친 사람들이 되었고 아이들은 아예 처음부터 경쟁 기계로 키워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교육을 말하고 아이들과 대중문화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아동문학의 현실과 전망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사실 오늘 한국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좋은 아동문학도 재미있는 아동문학도 아닌 자유다. 아동문학을 포함, 그들을 위한 어떤 가치있는 활동이나 생산물도 그들을 경쟁의 감옥에서 구출해내는 것보다 훌륭하진 않다.

발제자 박숙경 선생님은 90년대 초반부터 뚜렷한 아동문학의 양적 질적 성장이 이루어졌으며 그 주요한 원인이 그 시기에 아이들의 부모로 등장한 386세대 때문이라고 했다. 대체적으로 동의하지만 “386세대의 헌신”이라는 표현은 절반의 사실만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386세대는 오늘 아이들을 인간이 아니라 상품으로 키우는 일 또한 가장 헌신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가장 열심히 좋은 아동문학을 읽히고 생산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아이들을 가장 열심히 상품으로 키운다.
단적으로 말하면, 오늘 좋은 아동문학은 아이를 상품으로 키우는 데 아이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사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말은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지나친 것처럼 느껴진다. 그 시기만 해도 좋은 책은 좋은 뜻으로 읽혀진다. 다시 말해서 그 시기만 해도 좋은 책이 좋은 책으로만 읽히지 않을 결정적인 긴장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무렵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좋은 아동문학은 달라진 교육문제(라는 말은 실은 ‘학벌 문제’를 듣기 좋게 바꾼 말이다)에 대처하기 위한 도구로 여겨지는 것이다. 사지선다형 시험에서 수능과 논술 등으로 입시가 변화하면서 텍스트를 읽고 제 생각을 쓰는 능력이 중요해졌는데 386세대 부모들은 그런 능력이 대학입시에 닥쳐서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아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이 아이에게 좋은 책을 사주기 시작했고 수요의 급증이 다시 아동문학의 활황으로 이어졌다. 마치 옛날 부잣집에서 운동권 과외선생을 구하는 풍경(데모하는 걸 가르치지만 않는다면 똑똑한 운동권 대학생이 좀 더 제 아이를 잘 가르칠 수 있다는 노회한 판단에 의한)과 비슷한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에게 좋은 아동문학을 읽히되 그 안에 담긴 가치가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도록 갖은 노력을 다 한다. 권정생이나 박기범의 책은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책에 담긴 가치대로 사는 건 반대하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아동문학에 담긴 가치나 감동이 실제 삶과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거나 상업적으로 사용되기만 하는 거라면 우리가 아동문학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건 매우 무망한 일일 수밖에 없다. 막막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마치 블랙홀처럼 모든 정신적 가치들을 빨아들이는 이 자본의 시스템에 긴장해야 한다.

근래 교사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게 되면 꼭 빠트리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지배체제가 달라졌고 이제 진보적인 교사상도 달라져야 합니다. 단지 권위주의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은, 아이들과 민주적으로 소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교사상은 군사 파시즘 시절엔 진보적인 교사상이었지만 이젠 교사의 당연한 요건일 뿐입니다. 오늘 진보적인 교사는 자본의 가치관과 긴장하는 교사입니다. 오늘 아이들에게 자본의 가치관을 가르치는 교사, 경쟁력을 이야기하고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 같은 사람을 위인이라 가르치는 교사는 옛날에 아이들을 억누르고 때리며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가르치던 교사와 같습니다.”
외람된 말이나 오늘 아동문학계 전반이 갖고 있는 소박한 현실 인식이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되새겨야 한다. 물론 훌륭한 사회적 태도가 훌륭한 아동문학을 만드는 건 아니다. 문학은 논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같은 현실에서 훌륭한 사회적 태도가 결여된 아동문학이 훌륭하게 소구될 가능성은 매우 적다. 가장 인간적인 내용이 가장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현실에서 말이다.
아동문학이 다른 장르와의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는 현실은 아동문학업계의 성원들에겐 매우 중요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들이 문학에 더 관심을 갖게 하는 일, 혹은 아이들이 향유하는 정신적 생산물들의 분배와 균형을 갖추는 일보다 더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아동문학은 대체 왜 존재하는가? 아동문학은 아동문학가나 아동문학계를 위해 존재하는가, 어린이들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런 고민을 통해서만 우리는 모든 속물주의적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몇 권이나 팔리는가, 얼마나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는가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그런 외형적인 가치들에 집착하게 된 우리의 모습이다.
아이들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작품이 배제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아무 죄도 없이 자본의 가치관에 빠진 부모와 어른들을 만나 수인처럼 살아가는 그들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위로를 주는 작품은 얼마나 훌륭한가. 사실 대개의 사람들에게 어린이책의 주인은 어린이가 아니다. 좋은 어린이 책은 '어른이 보기에 아이게 좋다고 여겨지는 책‘인 것이다. 그래서 ’좋은 어린이책‘은 아이들이 따분해하고 아이들이 흥미로워 하는 책은 어른들이 마땅치 않아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어린이 책의 주인은 어린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며 그들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작품을 존경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작품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혹은 종종 의도적으로 담겨있는 상품으로서 욕망에 대해 우리는 성찰해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의 영혼을 파괴하는 시절에 걸맞은 죄책감과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발제자가 말한 “마법 지팡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07/08/22 23:35 2007/08/22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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